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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우유 Apr 14. 2021

[소설 '구독 인간'] 거북이의 꿈(4)

토끼가 되고 싶은 모든 거북이들에게


  ‘LA 지사 나근면 부장, 마케팅 1팀 팀장 근무를 명함’      


  LA근무 8년 차가 되던 해, 본사 귀임 발령이 났다. 남들보다 오랜 기간 해외 근무를 한 탓에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모두가 선호하는 마케팅 1팀으로 발령이 나서, 근면은 내심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치동에 집을 구하려고 알아보는데 해외 나올 때 비해 거의 두 배나 오른 전세 가격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해외 근무하면 돈을 모아 대출을 끼고 강남에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집 값은 이미 저 세상 가격이 되어 있었고, 전세 가격 역시 근면이 감당하기엔 벅찬 수준으로 올라있었던 것이다.      

출처: 픽사베이

  게다가 본사에 있는 동기들 말에 따르면 회사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52시간제 도입과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이슈로 , 상사가 부하직원 눈치를 볼 일이 많아 일하기가 쉽지 않단다. 본인들이 신입 사원이었을 때는 팀장의 개인적인 심부름도 군말 없이 해냈는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근면은 ‘나 때는 위에서 까라면 깠는데’ 라며 여러 가지로 짜증 나고 억울했지만 팀장이 됐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일단 한국에 돌아가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면과 그의 아내는 인터넷으로 부지런히 손품을 팔아 겨우 개포동에 구축 아파트 전세를 찾아냈다 30년이 넘어 녹물이 나오고 주차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주변 환경과 학군이 좋아 윤서를 키우기에 적합했다. 워낙 매물이 없어 직접 볼 것도 없이, 인터넷에 적힌 부동산 전화로 전화해서 바로 가계약금을 보냈다.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근면 내외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입사 후, 첫 팀장을 맡은 설렘을 가슴에 안고 출근한 근면은 듣던 대로 예전과는 180도 달라진 본사 분위 탓에 사무실 공기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LA에 있을 때는 지사장만 잘 맞추면 됐는데, 본사에 오니 상무님은 물론 팀원들 눈치까지 봐야 했다. 특히 근면의 세대와는 달리 2030 세대들은 6시가 되기 무섭게 퇴근했는데 이러한 것들에 적응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케팅 1팀은 본사에서 바쁘기로 손에 꼽히는 부서라 부득이 야근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 그놈의 52시간제와 PC 오프제 때문에 직원들을 붙들고 잔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근면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직원들에게 늦게까지 일을 하자고 말은 못 하고 혼자 주말에 사무실로 나와 밀린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 한 달도 되지 않아 근면은 심리적으로 몹시 지쳐있었다. 상무는 상무대로 실적 압박하며 쪼아대고, 아랫사람들은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집에 가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좁아터진 집에 세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자니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것 같았다. 틈만 나면 윤서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며 투정을 부렸고 아내는 LA로 떠날 당시 집을 샀어야 했다며 짜증을 냈다.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없는 탓에 근면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서 가급적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집에서는 구박받는 가장이지만 회사에 가면 그래도 팀장 대우를 해주는 직원들이 있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가끔 해외 근무 시절,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지사장의 모습을 시나브로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곤 했다.      


  팀원들 중, 유난히 근면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윤지 과장이었다. 일은 깔끔하게 해냈지만 도무지 ‘눈치’라는 게 없었다. 팀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위치인만큼 알아서 팀장과 함께 야근도 하고, 저녁도 먹어주면 좋으련만, 이윤지 과장은 정확히 6시 10분이면 칼퇴근을 했다. 한 번은 나근면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삼겹살에 소주를 사겠다고 했는데 이윤지 과장은 필라테스를 가야 한다며 참석하지 않아 근면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게 했다. 그 후로 근면은 유독 이윤지 과장이 들고 오는 각종 보고서며 결재 문서에 대해서만 꼬투리를 잡아 이윤지 과장을 잡기 시작했다. 내용상으로 큰 문제가 없었던 이윤지 과장의 보고서에 대해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문제 삼아 몇 번이고 문서를 반려했다. 이렇게 괴롭히면 이윤지 과장이 근면에게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윤지 과장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근면이 시키는 대로 문서를 고쳐왔고, 여느 때와 같이 6시 10분에 일을 마치고 퇴근했다. 사무실 밖을 나서는 이윤지 과장의 뒷통수에 대고 근면은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귀임 후 처음 ‘대전 모임’이 열리는 날, 근면은 오랜만에 멤버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지금은 비록 개포동에 살고 있지만, 최대한의 배려로 '대전 모임' OB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잊지 않고 자신을 챙겨준 대한이 퍽 고마웠다. 근면이 LA근무를 하는 동안, 최대한은 뛰어난 영업력과 특유의 유들유들함, 그리고 ‘대전 모임’의 도움을 받아 상무로 승진했다. 근면은 LA에서 사 온 명함지갑을 챙겨 ‘대전 모임’ 점심 식사 장소로 향했다.      


  ”나 팀장! LA 다녀오더니 캘리포니아 스타일 다 됐네!! “     


  대한이 근면을 반갑게 얼싸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대한은, 안 본 사이 많이 변해있었다. 예전보다 머리가 많이 벗겨져서 이것을 감추기 위해 뒷 머리를 최대한 앞으로 끌어당겨 앞머리를 만들었다. 게다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배가 복어처럼 불러있었으며 탄력을 잃은 얼굴은 촛농처럼 흘러내렸다. ‘상무’라는 직함과 외모를 맞바꾼 것 마냥, 대한은 남루한 외모로 승진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 모임’을 위해 미국에서 사 온 벨트와 구두로 한껏 멋을 낸 근면은, 예전과 다르게 자신이 세련되어진것만 같아 어깨가 으쓱해졌다. 근면은 최대한에게 상무님이 되시더니 신수가 더 훤해지셨다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미국에서 선물로 산 지갑을 안겨주었다. 최대한은 뭘 이런 걸 사 왔냐며 손사래 치는 척하더니 이내 지갑을 받아 들고는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근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전 모임’은 여느 때와 같이 사내 소식을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LA에서 늘 그리워했던 끈끈한 분위기에 근면은 뭔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식사를 끝마칠 때쯤, 영업 2팀 신 과장이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출처:픽사베이

  ”안녕하세요, 영업 2팀 신영민 과장입니다. 제가 이번 달 말에 드디어 강남에 집을 마련해서요. 정든 ‘대전 모임’을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대전 모임’에서 받은 여러분들의 도움과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화기애애했던 식사 자리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최대한 상무를 비롯한 임원들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말없이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대전 모임’은 어색하게 끝이 났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최대한 상무는 근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회사에 충성하던 우리와는 달리, 요즘 젊은 직원들은 자기 실속을 정말 잘 차리는 것 같아. 회사에서 임원 달면 뭐하나.. 아직까지 전세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말이야. ‘대전 모임’도 예전 같지 않아. 요즘 회사에 강남에 자가를 가진 사람들이 ‘강자 모임’을  새로 만들어  자기들끼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던데.. 저 신 과장도 주말마다 부동산 강의에 임장에 회사일보다 투자에 더 열심히라고 하던데 결국 성공했네. 신 과장도 강자 모임 멤버가 되겠군 “    

 

  순간 근면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대한을 쳐다봤다. 영업 2팀에서 근무할 때, ‘대전 모임’을 소개해주던 최대한은 그야말로 근면의 롤 모델이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상무’라는 직함 빼고 대한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지. 순간 그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그러던 문득, 본인 역시 대한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고 앞으로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 한 켠이 몹시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간 근면은 아내에게 재테크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 역시, 안 그래도 동창회에 나가면 이 나이 되도록 집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화병이 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권해준 각종 부동산 어플 이름을 나열하며 휴대폰에 깔고 집을 알아보자고 했다. ‘집방’, ‘호구 노노’ 등 요즘 핫하다는 부동산 어플을 깔고 부부는 현재 갖고 있는 돈과 대출금을 포함해서 매매할 수 있는 집을 알아봤다. 하지만 ‘연식 10년 이하의 강남 아파트’를 사기에는 근면 내외가 가진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내는 일단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뛰고 있으니 강남이 아닌 지역이라도 전세를 끼고 집을 사자고 했고, 근면은 윤서 교육 문제도 있고, 회사에서의 체면도 있으니 강남 외 지역은 끌리지 않는다고 했다. 밤새도록 언쟁을 벌이다 결국 아내는 화가 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근면은 거실 바닥에서 홀로 ‘호구 노노’와 ‘집방’ 어플을 왔다 갔다 하며 예산에 맞는 집을 검색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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