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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우유 Apr 18. 2021

[소설 '구독 인간'] 거북이의 꿈(5)

토끼가 되고 싶은 모든 거북이들에게

 "띠링"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한 통 도착했다. 오늘 있을 '97 사번 동기모임'  리마인드 쪽지였다. 신입사원 시절에나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 같은 동기들이지, 지금은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는 사이인 마당에 무엇 때문에 매 분기마다 동기모임을 하는지 근면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매달 내는 동기 회비가 아까우니 고기나 실컷 먹고 오자는 심정으로 다녀오기로 하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출처: 픽사베이

 다들 바지 후크를 풀고 고깃집 방바닥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마실 것 같은 기세로 소맥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제는 어김없이 ‘부동산’이었다. 요사이 아파트 매매 때문에 부인과의 신경전으로 피곤했던 근면은 동기모임에서까지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지만, 늘 그렇듯 동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채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창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던 중, 명한이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얼마 전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글쎄 우리 아파트 호가가 내가 매매할 때보다 10억이 올랐다고 하네! 부동산에서는 나더러 집 팔고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라고 난리인데, 대출이 안 나와서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집 값이 올랐다는 자랑인지, 대출이 나오지 않아 힘들다는 하소연인지 모를  명한의 묘한 한 마디에 부어라 마셔라, 화기애애하던 동기모임의 분위기는 일순간 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어색한 공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명한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 8년 전에 나 LA 주재원 물 먹은 거 기억나지? 그 때 와이프랑 해외근무는 물 건너갔으니 한국에 집 사자고 하고는 대출 왕창 당겨서 강남에 집 산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 깔고 앉은 집 가격이 올라봤자 뭐하나 싶긴 한데.. 이거 원,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뭐야! 아하하하하하"


 아까 전까지만 해도 월급 노비의 비애를 나누며 다 같이 동지 의식을 나누던 동기들이, 명한의 한 마디에 갑자기 ‘유주택자’와 ‘무주택자’로 나뉘어 각자가 가진 맘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강남에 집을 산 동기들은 각종 세금과 규제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러면서 다들 말로는 힘들다고 했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에게 LA 근무 경험을 자랑하고 싶었던 근면은 ‘집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부장’인 무주택자 동기들과 처량한 신세가 되어 구석에서 조용히 소주잔을 기울였다.

     

 집에 돌아온 근면은 아내에게 강남이 아닌 지역도 좋으니 집을 사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한숨을 푹 쉬며 근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호구 노노’ 어플에 얼마 전까지 근면의 부인이 염두에 두고 있던 아파트 가격이 찍혀있었는데, 보름 전보다 호가가 1억이 올라있었다. 그날 밤, 근면은 1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근면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윤지 과장을 잡아대기 시작했다. 이윤지 과장이 사업 기획 보고서에   ‘추진 배경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는 이유에서다. 근면은 까칠하게 ‘추진 배경이라는 표현에 빨간펜으로  줄을 쫙쫙 긋고는  위에 ‘추진 목적이라고 수정했다.  외에도  과장이 작성한 시장분석과 연간 사업 계획이 맘에 들지 않으니, 퇴근전까지 고쳐서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이윤지 과장은  그렇듯, ” “라고 짧게 대답한 ,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선 6시까지 보고서를 수정하여 근면의 메일로 보내고는 6 10분에 퇴근을 했고 근면은 이윤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몹시 언짢았다.


 다음날, 근면은 회의실로 이윤지 과장을 불러 큰 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따위로 일 하면서 매번 정시 퇴근을 할 생각이 나냐며, 앞으로 7시 전에는 집에 갈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자리에 돌아온 근면은, 여느 때와 같이 LA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경한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어 이윤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윤지와 입사 동기인 경한은, 근면의 하소연에 공감을 해주면서도 근면에게 이윤지 과장이 시크하고 무뚝뚝하지만 일도 곧잘 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이에 근면은 이경한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며, 이윤지에 대한 불만을 메신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1시간 동안 사내 메신저로 이윤지에 대한 험담을 하고 나니 근면은 스트레스가 다소 풀리는 것 같았다. 묵묵히 자신의 불만을 들어준 경한에게 근면은 다음번에 밥을 살 테니 그 때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고 마무리하며 메신저 창을 닫았다.  

    

 그 날 저녁, 근면은 이윤지에게 사업기획서 최종본을 내일 오전까지 보고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에 일찍 들어갔다. 아내와 윤서가 좋아하는 옛날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현관에 들어선 근면을 아내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윤서 아빠, 집주인한테 전화 왔는데, 자기들이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면서 우리더러 나가 달라고 하네 “     


 근면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집주인들이 이 집에 들어올 때 분명 우리더러 오래 살아달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했다. 아내는 요즘 신문도 안 보냐며, 얼마 전 통과한 ‘임대차 3법’ 때문에 전셋값을 5% 이상 올릴 수 없게 된 집주인들이 세입자를 내 보내고 다시 들어와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아내는 이만한 가격에 이런 집을 구할 수 없는데 어떡하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왔지만 근면은 집에서 편하게 쉴 수 없었다. 근면 내외는 서둘러 저녁을 먹고는 ‘호구 노노’와 ‘집방’을 켜고 조건에 맞는 전셋집을 찾기 시작했는데, 임대차 3법 때문인지 전세 매물이 그야말로 씨가 말라 있었다. 때마침 거실에 틀어놓은 TV 뉴스에는 전세를 구하는 사람들이 집을 보기 위해 아파트 복도에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밤새 부동산 어플로 전셋집을 구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근면은 초췌해진 몰골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사무실에 근면이 들어서자 삼사오오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근면을 보고 수군거리며 흩어져서 자기 자리에 돌아갔다. 그러고는 이내 바쁘게 울려대는 타자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을 울려댔다. 근면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근면의 메신저에 수많은 대화창이 뜨기 시작했다.  

    

‘나 부장, ’ 불어야 돼‘ 게시판 봤어? 나 부장을 저격하는 글이 올라왔던데’     


 메신저의 내용을 확인하던 근면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출처: 픽사베이

 근면은 서둘러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불어야돼’ 어플에 접속하여 사내 게시판에 들어갔다. 어젯밤에  ‘마케팅 1팀의 못된 바보, N부장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것이다. 내용인즉슨, 회사에서 사람 좋은척하고 다니지만 알고보면 부하 직원에게 말도 안 되는 야근을 시키고 보고서 내용을 꼬투리 잡으며 삽질시키는, 무능력하고 성질 더러운 부장의 민낯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본인이 봐도 영락없는 근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순간 근면의 동공은 확장됐고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손은 심하게 떨렸다. 누구지? 누가 이딴 글을 올린 것이지? 글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유추하는 근면의 눈 앞에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하는 이윤지 과장이 들어왔다. 순간 근면은 상기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 과장을 향해 다가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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