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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우유 Apr 03. 2021

[소설 '구독 인간'] 거북이의 꿈(1)

토끼가 되고 싶은 모든 거북이들에게

  “ 미안합니다. 나 오늘은 약속이 있는데! 혹시 다다음주 수요일 점심은 어때요?


  월요일 오전 11시. 적막한 마케팅 1팀 사무실에 점심 약속 잡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팀원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나 부장의 점심 약속 잡는 통화 소리에 이미 익숙해진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다만 모니터 앞에 앉아 타닥타닥 타자를 부지런히 두드리며 메신저로 누군가와 열심히 대화할 뿐이다.


  나근면 부장, 48세. 국내 굴지의 식품 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회사에서 밀어주는 핵심 인물로, 동료들과의 점심, 저녁 약속이 끊이지 않는 ‘핵인싸’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늘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아버지께서 동네 유명한 점집에서 10만 원, 그 당시 상당한 거금을 주고 지은 이름이다. 학창 시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늘 성실하게 학교 생활에 임해왔다. 두뇌회전이 빠르진 않아 시험 기간에 밤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남들은 지나치기 쉬운 부분까지 형광펜과 빨간펜을 이용해 책에 구멍이 날 정도로 별표와 물결 표시를 총동원하여 통으로 외운 덕분에 학창 시절 성적은 중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12년 학창 시절 내내 축적한 꼼꼼함과 성실함, 그리고 질긴 엉덩이 힘은 회사에 들어와서도 빛을 발해 일하는데도 퍽 도움된다. 물론 숲 전체보다는 나무를 보는 마이크로 매니징에 능한 실무자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요령껏 뒤로 빠지는, 간부로서의 리더십이 다소 미흡하지만 물량 창고 재고 숫자를 맞추거나 부하 직원이 써 온 보고서의 오탈자를 발견하는 데는 나 부장을 따라올 자가 없다.


  오늘은 ‘대전 모임멤버와 점심 식사를 하는 날이다. 사내 핵심 인물들이 모인  모임에 절대 빠질  없다. 모임 이름만 봐선 대전 향우회 모임 같지만 여기서 ‘대전이란, ‘대치동에 전세 사는사람들을 일컫는다. 다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대치동에 전세를 살며 서로의 애환을 다독거리는 것도 있지만, 진짜 중요한 목적은 사내 고급 정보가 바로 ‘대전 모임 통해  처음 시작되는 탓에 ‘대전 모임멤버라는 사실에 근면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최근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앱인 ‘불어야  통해 정보의 유통 범위가 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넓어지긴 했지만, 인사팀에서 맘먹고 게시판을 털면 누가 글을 썼는지   있다고도 하고, 실제로  팀에서 앙심을 품고 선배에 대해 험담하는 글을  신입이 들통이 나서 곤혹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다들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는 ‘불어야돼 올리지 않는다. 어느 팀의 과장이 인턴한테 집적댔다가 차였다더라 정도의 가십거리만 간혹 올라올 뿐이었고, 승진, 보직 발령  ‘ 정보  ‘대전 모임 통해서만 공유되고 있었다.  부장이 회사에서 승진을   있었던  특유의 성실함도 있었지만 사내 핵심 사조직인 ‘대전 모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IMF가 한창이었던 90년대 후반, 본인을 받아준 회사가 근면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신입 때부터 특유의 성실함으로 회사에서 ‘스마트하진 않지만 부지런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 같이 일하기 좋은 직원’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서울 시내 중위권 대학교를 나온 나 부장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었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며’ 으쌰 으쌰 하던 동기들이 직급이 올라갈수록 암암리에 동문회니 동네 반상회니 회사 내 사조직을 통해 이른바 ‘라인’에 들어가 중요한 프로젝트를 너무나도 쉽게 따거나 핵심 부서로 이동하는 것을 보아 오면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회사에서 단 한 명뿐인 고향 선배이자 대학교 동문인 최 상무의 도움으로 영업팀을 거쳐 기획팀으로 이동하면서 그러한 것들은 이제 술 안주거리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최대한 상무와는 영업 2팀 시절, 구로구에 있는 대형 마트에 외근을 다녀오다가 가까워졌다. 그 당시 나 부장은 과장이었고 최 상무는 차장이었는데,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동향인 것을 알게 됐고, 심지어 대학까지 같은 걸 확인하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회사 내 유일한 ‘연줄’이었던 대한을 근면은 믿고 의지했다. 최대한 역시 질긴 엉덩이와 특유의 우직함으로 윗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그런 대한을 보며 나도 열심히 일하다 보면 저렇게 회사의 핵심인재가 될 수 있겠다며 희망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대한과 근면은 한 팀이 되어 서울 시내 주요 마트를 돌며 영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외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대포 한 잔 하면서 대한으로부터 회사 내 정보를 듣는 게 너무나도 재밌었다. 최대한은 회사 소문에 빠삭했고, 남들보다 일찍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번에 모 부장이 술자리에서 사장에게 잘 보여 뉴욕 지사 파견이 내정이 되었다던가,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채 좌천된 모 차장이 알고 보니 지방 영업소에서 여직원을 성희롱했기 때문이었다는 등의 소문을 남들보다 한 달은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처럼 일만 하느라 소문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근면에게 최 대한은 그야말로 닮고 싶은 ‘롤모델’이었다.


  알싸한 찬 바람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던 10월의 어느 초저녁. 외근을 다녀오는 길에 대한의 제안으로 둘은 종로의 한 호프집으로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최대한은 치킨을 뜯으며 호기롭게 회사 소문을 근면에게 알려주었고, 근면은 연신 맥주잔에 생맥주를 따르며 대한이 늘어놓는 정보들을 하나라도 더 기억해놓기 위해 부지런히 머릿속에 입력했다. 얼굴이 반쯤 벌개져 취기가 오른 최대한은 나근면을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과장 너, 이 회사에서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냐?"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닭다리를 집으려고 팔을 쭉 뻗던 근면은 급작스런 대한의 질문에 흠칫 놀라 포크를 거두며 겸연쩍게 대답했다.


  “ 글쎄요 선배님. 백도 없고 뭣도 없는 제가, 부장까지 가면 성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야 뭐, 큰 욕심 없고요.. 애들 대학교 졸업하고 자기 앞길 닦아 놓을 때까지 다니다가 퇴직하고 서울 근교로 가서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살아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힘없이 말꼬리를 내리며 치킨 닭다리를 향해 다시 손을 뻗는 근면을 향해 대한은 반쯤 상기된 얼굴로 포크로 맥주잔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남자가 야망이 없네, 야망이 없어!! 나 과장 너, 동기 김명한 알지? 걔는 골프 배워서 ‘새러데이 골프 모임’ 멤버로 주말 없이 뛰어다녀. 그리고 신기주 알지? 걔가 왜 이번에 우리 회사 X ‘오! 마트’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에 투입됐는지 알아? 신 과장 그 자식, 주말마다 와이프랑 서울 시내 ‘오! 마트’ 투어 하면서 느낀 우리 제품의 경쟁력과 단점을 자기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리포트를 상무님한테 이메일로 월요일마다 보고한다더라고!!!”


  치킨을 한 입 물고 우물거리며 씹던 근면은, 순간 멈칫했다. 명한과 기주는 입사 동기로, 자신감 있는 성격과 재미있는 언변으로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외모도 훤칠해 사내에서도 존재감이 있었다. 입사 초기, 같은 조에 편성돼 장기자랑을 하면서 친해진 근면과 명한, 기주는 삼총사로 어울려 다니며 소개팅도 하고 근교로 여행을 다니며 우정을 다져왔다. 아니 우정을 키워왔다는 건 근면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셋이 어울려 다니긴 했지만 근면은 명한과 기주에게 어딘지 모르게 장벽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명한과 기주는 강남에 소재한 고등학교 출신에 유명 사립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대화 중에 명한과 기주만 통하는 듯한 정서와 추억이 있었다. 강남에서 나고 자라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때문인지, 그 둘은 늘 자신감이 있었고 근면은 그런 그 둘의 당당함이 늘 부러웠다. 대화 중에 그 둘은 종종 강남의 유명 영어 학원 이름이라던지 대학교 근처 술집과 같은 그 둘만이 아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것을 처음 들어보는 근면은, 그들의 대화에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근면은 어렴풋이 내 자식은 강남에서 교육시켜 내가 갖지 못한 배경을 갖게 해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대리를 달게 된 입사 3년 차부터 명한과 기주는 어느 날부턴가 근면을 빼놓고 그 둘만 참석하는 술자리가 부쩍 잦아졌다. 맨 처음에는 명한과 기주도 근면에게 모 임원이 주관하는 술자리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깐깐한 팀장과 일을 다 미루는 선배 때문에 야근에 시달렸던 근면이 제안을 몇 차례 거절했더니 자연스레 셋은 ‘둘과 하나’로 쪼개졌다. 술자리를 열심히 다녔던 덕분에 명한과 기주는 입사 초기 쌈박하고 호리호리했던 외모는 사라진 채, 뱃살과 턱살이 제법 붙은 3년 차 아저씨가 되어갔고, 근면은 야근으로 뱃살과 더불어 다크서클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저녁 술자리의 보상은 생각보다 컸다. 명한은 고등학교 선배인 변 부장의 연줄을 이용해 기획팀으로 발령받게 되고, 기주는 마케팅 1팀으로 들어가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에 투입되게 되었다. 사내 인트라넷에 인사 발령이 뜨던 날, 근면은 잔업을 뒤로한 채 씁쓸하게 컴퓨터를 끄고 일찍 퇴근했다. 동네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 아내가 끓여놓은 김치찌개와 부추전에 반주를 하며 TV를 보다가 이내 피곤해져서 잠자리에 들려는데 딸내미가 그림책을 들고 이불속에 따라 들어와 근면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아빠, 책 읽어줘”


  술기운에 노곤한 기운을 빌려 다 잊고 자고 싶지만, 근면은 억지로 그림책을 받아 들고는 무슨 책인지 표지를 살펴봤다. 밝은 표정으로 달려가는 토끼와 거북이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기어가는 그림 위에 큰 글씨로  ‘토끼와 거북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렸을 때 근면에게 매사에 성실하게 임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준 동화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 어학연수 한 번 가지 못해 남들보다 토익 점수가 더디게 오를 때마다 근면은 어렸을 때 읽었던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며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남들보다 앞서리라 위로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도저히 딸에게 거북이처럼 최선을 다해 우직하게 살아가라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근면은 딸이 건네주는 그림책을 받아 협탁에 치우고는 딸을 꼭 껴안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윤서야, 꼭 거북이가 될 필요는 없어. 세상은.. 세상은 조용히 움직이는 존재에게 관심이 없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묵묵히 최선을 다할 필요 없어. 토끼처럼 빨리 달릴 수 있게 태어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중요한 능력인 거 같아. 으흐흑 흐그흑흑”


  혼자 넋두리를 읊조리다 근면은 울음을 터뜨렸다.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는 딸을 부둥켜안고 10분 정도 술주정을 쏟아낸 후, 이내 코를 골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회사 안 가냐는 아내의 잔소리와 함께 눈을 뜬 건, 금요일 아침 8시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근면은 팀장에게 ‘오늘 몸이 좋지 않아 회사를 쉬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올해 들어 쓴 첫 휴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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