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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우유 Apr 07. 2021

[소설 '구독인간'] 거북이의 꿈(2)

토끼가 되고 싶은 모든 거북이들에게


     호프집에서 헤어지면서 대한은 근면에게 ‘대전 모임’에 한 번 나와보지 않겠냐고 했다. 2008년 당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집값은 곤두박질쳤고, 빚을 내 집 산 사람을 가리켜 ‘하우스 푸어’라고 놀려대며 집을 사는것보다 전세 사는게 낫다는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당시 대치동 25평짜리 아파트에 전세를 살고 있었던 최대한은 근면에게 대치동에 저렴한 빌라도 많다면서 윤서를 위해서도 대치동으로 무조건 들어오라고 했다. 아내와 상의해 보겠다고 대답하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근면은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대치동에 입성하면 윤서에게 ‘강남 키즈’라는 배경도 줄 수 있고, 회사에서도 ‘대전 모임’에 들어가 사내 고급 인맥도 만들 수 있다. 그럼 나도 명한과 기주처럼 핵심 부서에 들어가 승승장구 할 수 있고 내 인생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밤, 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잠에서 깬 아내는 자다가 왠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며 짜증을 냈다. 자기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물가도 싸고 편해서 좋다며 대치동에 가서 극성엄마로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근면이 일주일동안 끈질기게 설득한 덕분일까. 결국 아내는 ‘하여간 당신 고집은 꺾을 수 없다’며 대치동으로 가자고 했다. 그 날 바로 근면 부부는 최대한이 찍어준 동네에 자리한 방 두칸짜리 빌라를 전세 계약했다. 부동산에서 처음 만난 집 주인은 인상 좋은 노부부였는데, 자기들은 이 집에 실거주 할 일이 없으니 근면 부부에게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했다.


  근면이 대치동으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대한은 ‘대전 모임’에 근면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대치동 ‘금마 아파트’ 근처 고깃집에서 개최된 모임에 참석한 근면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업 1팀 이 상무, 기획팀 변 부장, 인사팀 한 부장 등 회사의 주요 보직을 차지한 핵심 인물들이 모두 ‘대전 모임’ 멤버였던 것이다. 소위 야망은 있으나 끈이 없는 동기들은 이들과 술자리 한 번 하기 위해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연줄을 닿아보려 하는데, 본인은 대치동 전세 계약 하나로 출세로 향하는 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기분이었다. 식사 후 근처 호프집에서 ‘대전 모임’ 2차까지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근면은 조직의 이너써클에 편입한 것만 같은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윤서에게 눈물을 흘리며 ‘토끼와 거북이’ 책을 읽어주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나, 나근면. 이제 더 이상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가 아니다.       


  ‘대전 모임’의 멤버가 된 후, 근면의 회사 생활은 훨씬 수월해졌다. 탄탄한 사내 네트워킹에 속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편한 것인줄 알았다면 그동안 머슴처럼 야근을 안해도 됐을텐데. 편안한 회사 생활을 위해 진작에 핵심 네트워크를 찾아 술잔을 들고 돌아다녀야 했던 것을, 과장이 돼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LA 지사에 중간 관리자급 자리가 하나 생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근면의 회사는 미국에 총 5개의 지사를 두고 있었는데, 그 중 LA의 경우, 한인 식당과 슈퍼마켓이 많아 일이 크게 힘들지 않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데 제격이라 사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근무지로 손꼽혀왔다. 예전엔 그런 자리는 회사에서 총애를 받거나 굉장한 뒷 배경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대전 모임’의 멤버로서 근면 역시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 평가 성적도 나쁘지 않고, 지원 후에 다음번 모임에서 ‘저 좀 팍팍 밀어주십시오!’ 외친 후 충성을 다짐하며 폭탄주 20잔 정도 마시면 가능성 있지 않을까라는 어렴풋한 자신감도 생겨났다.


  소문이 돌고 며칠 후, 사내 인트라넷에 정식으로 지원 공고가 났다. 저녁 8시,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서 근면은 파견 근무 지원란을 작성했다. 2,000자 내외로 적게 되어있는 지원란에 근면은 지금까지의 업무 성과와 자신의 열정을 LA 지사 실적 향상과 어떻게 연계할지에 대해 어필했다. 700점 후반의 토익 성적이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지원서에 영어 스피킹에 자신있다는 호언장담도 곁들였다.


  ‘제출’버튼을 누르고 근면은 휴대폰을 열어 인사팀 한 부장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눈 앞에 두고 근면은 한참을 망설였다. 술기운을 빌려 맘에도 없는 아부를 하는건 자신 있지만 맨 정신으로 한 부장에게 부탁을 하자니 도저히 못할 노릇이었다. 책상 앞에서 한참을 휴대폰만 쳐다보며 머뭇거리다가 휴대폰 액정을 끄고 무언가 결심한 듯, 근면은 사무실을 나섰다.


  금마 아파트 11동 앞. 근면은 대치동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한니발 과자점’의 케이크 상자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제과점이 문을 닫을까봐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다행히 생크림 케이크가 하나 남아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나 과장!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인사팀 한 부장이 슬리퍼 차림으로 다가오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근면은 환하게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 부장님! 오늘 사모님 생신이지요? 지난번 모임에서 말씀하셨던게 기억나서요. 이거 별 것 아니지만 받으십시오!”     


  금마 아파트에 도착하기 1시간 전, 사무실에서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찰나, 근면의 휴대폰에 갑자기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알람이 하나 떴다.      


  ‘한 부장 사모님 생일’      


  순간 근면의 머릿속에는 지난 번 술자리에서 한 부장과 술에 취해 이야기를 하던 중, 한 부장이 ‘다음주에 우리 마누라 생일이야’ 라고 말한 것을 휴대폰에 저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바로 이거다. 아무리 사내 소식에 빠삭하더라도 사모님 생일을 아는 사람은 없을거다. 올해 재미삼아 본 토정비결 어플에  ‘마른 강에 물이 들어오는 격’이라고 하더니, 하늘이 이렇게 도와줄 줄은 몰랐다.      


  근면은 생일 축하 멘트와 함께 케이크 상자를  부장에게 넘기듯 안겼다.  부장은 이미 케이크를 샀다며 한 손으로 밀어내는척 했지만 다른  로는 이미 케이크 상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니발 과자점 케이크. 지난 번 동네 학부모 모임에서 먹었다며 오래전부터 한니발 과자점 노래를 부르는 아내를 위해 생일에 한니발 과자점의 케이크를 사주고 싶었지만 무슨 놈의 케이크가 5만원이 넘는지, 강남은 한낱 크림 바른 빵에 지나지 않는 케이크 따위도 더럽게 비싸다 싶었다. 결국 그 옆에 프랜차이즈 제과점 케이크를 사갖고 들어가 마누라에게 바가지를 긁혔는데, 센스있는 나 과장 덕분에 아내에게 점수 좀 딸 수 있을 것 같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근면을 보내고는 동 주출입구에 들어오다 문득, 한 부장은 나 과장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인이 워낙 훌륭한 선배이기 때문에 이 정도쯤은 받을 자격이 있다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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