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박우유 Apr 10. 2021

[소설 '구독 인간'] 거북이의 꿈(3)

토끼가 되고 싶은 모든 거북이들에게

  발령  아침. 근면은 옷장에서 아끼던 슈트를 꺼내 입었다.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환한 얼굴로 근면을 향해 웃고 계셨다. 매우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꿈이었다.      


  회사에 출근한 근면은 오전 내내 인사발령 게시판을 들락날락하며 연신 새로 고침 버튼을 눌러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 시간이 열 시간 같고,  반나절이 일주일 같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근면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한 부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축하하네. 3시쯤 발령이 뜰 거야.’     


  근면은 두 눈을 의심했다. 두 번 세 번 읽어봐도 근면이

LA 발령자로 선정됐다는 내용이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오전에 처리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겨우 일을 끝마친 후 점심을 먹고 담배 한 대 피러 회사 옥상에 올라간 근면은 기주와 명한, 그리고 몇몇의 동기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동기들 역시 오늘 발표날 LA 발령 대상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기들 대부분이 LA 발령을 지원했는데, 다들 아이들 교육과 전셋집 문제로 고민하던 찰나에 이번 파견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은 기회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들었어? 이번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발령자 후보에 올랐다던데”    

 

  기주가 담배를 피워 물며 심드렁하게 내뱉듯 말했다. 이에 명한도 거들 듯 ‘이번에 무슨 이유인지 인사팀의 강력한 주장으로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 선정됐다고 하더라’면서 ‘학연, 지연을 타파한, 혁신적인 인사 발령 체계 구축을 위해 이번에 인사팀이 파격적인 실험에 가까운 발령을 내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주와 명한은 반쯤 체념한 말투로 아무래도 LA는 물 건너간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근면은, 자신이 ‘조직의 배려로 파격적인 조건을 적용해야 겨우 LA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묘하게 불쾌했지만 모로 가도 LA만 가면 됐지라는 심정으로 엷은 미소를 지은채 묵묵히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오후 3시 10분. 인트라넷 게시판에 ‘영업 2팀 나근면, LA 지사 발령’이라고  올라왔고 그 날, 근면의 메신저는 그야말로 불이 났다. 최대한을 비롯한 몇몇의 동료들은 진심으로 근면을 축하해주었고, 몇몇의 동기들은 마지못한 축하인지 무엇인지 모를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 왔다. 근면은 하루 종일 축하 메신저에 대답하고는 6시가 되자마자 가방을 챙겨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갔다.


  LA 발령 소식을 서프라이즈로 알려주고 싶었던 근면은 집 근처 꽃집에서 아내에게 안길 장미꽃 한 다발을 사며 아내에게 건넬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현관문을 열고 아내를 보는 순간, 그간의 고생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꽃가게에서 연습한 멘트가 무색하게 꽃다발을 안겨 주며 ‘LA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안 그래도 윤서가 동네 아이들에 비해 영어가 부족해서 걱정이었는데 LA에 가게되어 걱정 하나 덜게 되었단다. 그 말을 들은 근면은 딸에게 강남 키즈라는 타이틀에 더해 영어 네이티브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어 뿌듯해졌다.     


  LA 출국까지 2달 동안 근면 내외는 전셋집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싸고 윤서 학교 문제를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집주인은 좋은 임차인을 만나 신경 안 쓰고 좋았는데 이사를 가게 돼서 섭섭하다고 했다. 보증금을 돌려받은 날, 근면은 전세를 끼고 집을 살지, 아니면 주식에 투자할지 고민했다. 아내는 요즘 주변에 하우스 푸어가 너무 많다며, 집 값이 더 떨어질 것 같으니 섣불리 집을 사지 말고 통장에 넣어두었다가 귀국 후에 상황을 봐서 집을 사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근면도 고개를 끄덕이며 해외에서 돈을 모아 서울에 아파트 하나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LA지사에서의 근무는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연간 매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본사에서 출장이나 여행 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았고,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지사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근면을 힘들게 했다. LA 지사는 총 3명의 본사 직원과 5명의 현지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근면은 부하 직원인 이경한 대리와 가까이하며 힘든 상황을 버텼다. 지사장이 근면을 닦달하는 날엔, 근면은 이경한과 함께 퇴근 후, 인근 한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근면보다

열 살 어리지만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남의 말에 공감을 잘해주는 경한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했다.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진 않지만, 윗사람에게 늘 깍듯한 그를 근면은 퍽 맘에 들어했다. 그래서일까. 힘들때마다 더더욱 경한에게 심적으로 의지했고 싱글로 해외 지사에 나온 경한을 각별히 챙기며 자기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거나 다른 회사 사람들과 주말에 골프를 칠 때마다 경한을 초대했다.     

 

  업무 외에, 생활적인 면에서의 만족도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근면 부부는 정원이 딸린 2층 집에 해외 수당을 받으며 윤서를 미국 공립학교에 보냈는데, 온 가족이 풍족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특히 윤서의 영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것을 보며 영어 콤플렉스가 있었던 근면은 대리 만족을 느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귀국해도 강남 애들에게 영어로는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사장에게 시달리는 날엔 다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때마다 명품 아웃렛에서 질 좋은 옷과 가방을 ‘득템’하여 행복한 아내와, 능숙한 영어로 친구와 전화 통화하는 윤서를 보고 있자면 피로가 씻은 듯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해외 근무를 한 지 몇 년이 흘러, 때마침 강남을 주제로 한 한국 노래가 미국을 강타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 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미팅 시작 전, “두 유 노우 강남?” 으로 시작하는 근면의 아이스 브레이킹은 미국 바이어들의 호감을 샀고, 부족한 영어 실력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K팝과 강남에 대한 관심 덕분에 한식당에 주로 판매되었던 인스턴트 비빔밥과 냉동만두 등이 미국 현지 온오프라인 유통사에 입점하게 되었고, LA지사 실적은 역대 최고를 기록하게 되었다. 덕분에 근면은 그 후 해외 근무 기간 동안 차장을 거쳐 부장으로 고속 승진하게 되는데 이는 창립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부장으로 승진하던 날, 근면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열었다. 아내와 와인잔을 부딪히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부부는 강남에 전세를 살게 된 것이 인생에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꼭 강남에 살자고 다짐했다. 그러던 중 문득, 근면은 지난날 자신을 ‘대전 모임’에 끼워준 최대한이 생각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지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 대한을 위해 아웃렛에서 지갑이라도 하나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소설 '구독인간'] 거북이의 꿈(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