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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미 Apr 09. 2022

그린패스가 없어요?

  친구가 대상포진에 걸려 벌써 열흘 넘게 고생하고 있다고 하기에 찾아갔었다. 아픈 것으로 유명한 대상포진에 걸려 밤이면 잠도 못 자고, 일도 못한다고 하기에 병문안을 가기로 했던 거다. 빈손으로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싶어 밤 1kg을 봉지에 담고, 산딸기 잼을 넣은 크로스타타를 구워서 가지고 갔다. 


 친구의 집은 로마 시내에서도 중심가인 멋진 아우렐리아 성이 보이는 산조반니에 있다. 우리 집에서는 50분 정도 걸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찾아간다는 말에 친구는 멀리서 오겠느냐며 미안해했다. 나는 부지런히 크로스타타를 굽고, 식히고, 포장하고, 점심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급하면 평소에 잘하던 일도 뭔가가 잘 안 되는데, 역시나 기차를 타려고 발을 디디려는 순간 마스크를 잊고 온 게 생각났다. 30분이나 지나야 다음 기차가 오는데 낭패다. 마음이 바쁘면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기차를 기다려서 타고,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친구 집에 가는 길은 그래도 뭔가 즐겁고 기대감으로 뿌듯하기까지 하다. 생각보다 친구의 고통은 심해 보였다. 등, 허리, 배까지 붉은색 물집이 넓게 퍼져있었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는 물집 같아 보이는데 친구는 밤에 통증이 무척 심하다고 했다. 작은 상처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힘든 일도 씩씩하게 잘 해내는 그녀가 이렇게 말할 때에는 무척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평소에 집안일을 잘 안 하는 그녀의 남편이 밥을 해주고 있고 아들들이 거들어 준다고 한다. 덕분에 호사한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너스레 사이에 불편하고 아쉬운 심사가 보인다. 친구의 남편은 내게 커피를 내준다. 말수가 적은 그는 최소한의 말만 아껴서 한다. 반면 온화한 인상의 친구는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설령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누구든 곧 그녀의 친근함 속에 빠져들게 한다. 아마 나도 그녀의 그 친근함과 자연스러움에 마음을 열게 된 것 같다. 친구는 식탁 위에 이것저것을 내놓고, 나도 그동안 못 만난 사이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전 이제 곧 나가서 항원검사를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때였다. 순간 번개의 속도로 공기가 급 냉각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로까지 느껴지는 그 서늘함이란. 이제 공기는 두부처럼 칼로 자를 수도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린패스가 없어요?"

말수가 적은 그녀의 남편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 짧은 말에 묻힌 의혹, 힐난, 낭패감이 전류처럼 흘러 팔뚝에 얼굴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빠지직! 머리가 멍해진다. 1초도 안 되는 것 같은 짧은 시간에 감염, 격리, 고통, 통증, 후유증, 등 온갖 장면들이 번쩍거리며 펼쳐진다. 여기서 난 위험한 인물이다. 난 이 전염병의 시대에 모든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백신 접종 미완료 자다. 특히나 병을 앓고 있는 친구에게 나는 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갑자기 난 말이 빨라지고, 말하는 입이 오므라들고, 커피를 줄줄 흘리고, 의자가 출렁거리는 것 같고, 얼굴에 불을 담은 듯 화기를 느낀다. 급하게 자리를 마무리를 하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다. 급하게 일어나다 보니 의자에서 일어날 때 탁자를 밀쳐서 탁자위에 있던 물건들이 부딫친다. 나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둥지둥 거리로 나온다. 숨을 크게 쉰다. 그리고 내 행동을 후회한다. 이때까지 이걸 생각하지 못했다니. 요즘은 생각을 180도가 아닌 360도, 아니 그보다도 더 크게, 자세하게, 입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난 내가 만든 크로스타타를 전해줄 생각, 아픈 친구를 잠깐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으로 더 중요한 걸 잊은 거였다. 


난 아직 백신 접종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로 그린패스가 없다. 그래서 대신 48시간 유효한 항원검사를 받아서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난다.  내일은 학교에 가는 날이니 오늘 오후에는 항원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친구지에서 그 말을 했던거다. 그래서 유일하게 무료로 검사를 해주는 중앙역 테르미니에 가서 검사를 받을 요량이었는데... 요즘의 삶은 종종 이렇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나는 어제 굽고 남은 파이 반죽을 가지고 다시 크로스타타를 굽는다. 크로스타타는 밀가루와 설탕, 버터, 달걀, 과일잼을 기본으로 하는 이탈리아 전통 과자다. 파이 반죽을 파이 틀에 펴 올리고 과일잼을 올린다. 그 위에 리본 모양으로 자른 반죽을 격자로 얹어 구워내는 소박한 파이다. 이탈리아 어느 곳을 가도 찾아볼 수 있는 파이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 재료로 만들 수 있다. 특히 살구잼을 얹은 크로스타타는 라면계의 삼양라면이라고나 할까?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크로스타타가 익어가면서 달콤한 냄새가 집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내일 아침에 커피와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 구석이 조금 밝아진다. 

그리고 어제 못한 항원검사를 받으러 가기로 한다. 다녀와서 바로 음성임을 친구에게 알려줘야겠다. 걱정을 산같이 하던 친구의 남편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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