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탐구생활

[한글 Ep. 3] K-Pop의 성공 비밀은 한글?

왜 외국인이 BTS의 “봄날”을 듣고 울까? 한국어가 뇌를 조각하는 방식

by 법의 풍경

들어가며: 세 가지 놀라운 관찰

관찰 1: 2024년 한 해에만 21만 명의 외국인들이 세종학당에서 한글을 배웠고, 전 세계 256개 세종학당에 1만 5천 명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2024년 기준). 로스앤젤레스 한 곳에만 600명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줄을 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지 드라마 대사를 알아듣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립니다.

세종학당: 한국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세종학당재단’이 운영하는 글로벌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 기관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


관찰 2: 포르투갈에 거주 중인 28세 브라질 K-Pop팬 타시아(Tássia)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명과 자막이 없어도 음악 자체가 하나의 언어예요.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들으면 영혼이 솟아오르는 듯한 자기 확신을 느낄 수 있어요” 신경과학자들은 한국어를 말할 때만 특별히 활성화되는 뇌 영역을 발견했다고 보고합니다.


관찰 3: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한 한글은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극찬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왜 한글이 과학적인지, 어떤 면에서 독특한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관찰은 무작위로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놀라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오늘 그 그림을 완성해보려 합니다.


제가 증명하려는 가설:


한국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니라, 우리 뇌를 물리적으로 다르게 조각하는 신경언어학적 기술이다.
그리고 K-pop의 세계적 성공은 이 독특한 인지 구조가 음악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결과다.



1단계:

탐정의 방법론 - 귀추법으로 추리하기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저는 셜록 홈즈,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가 사용하는 방법, 미국의 다빈치라 불리는 찰스 퍼스와 움베르트 에코가 발전시킨 귀추법(abduction)을 사용하겠습니다.

귀추법은 놀라운 관찰에서 출발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가는 추론 방법입니다.


개념박스: 귀추법(Abduction)

연역법: 규칙 + 사례 → 결과 (수학적 증명)
귀납법: 사례들 → 규칙 (통계적 패턴)
귀추법: 놀라운 사실 → 가장 그럴듯한 설명

예시: 아침에 잔디가 젖어 있다
연역: “비가 오면 젖는다 + 비가 왔다 → 젖었다”
귀납: “10번 관찰했더니 다 비 온 날이었다”
귀추: “잔디가 젖었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비”(하지만 스프링클러, 이슬 등 다른 가능성 탐색)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첫 장면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동물이 지나간 흔적만으로 말의 이름 ‘브루넬로’를 추론하듯, 저는 아이돌에 이어 케데헌, 지난 달 지드래곤이 파리 콘써트에서 4만 5천명의 관중을 불러 모으며 일으키고 있는 K-pop 돌풍의 “흔적”에서 한국어의 신경과학적 본질을 추론하겠습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을 때 음악 평론가들은 당황했습니다.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데도 중독된다”는 리뷰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오빤 강남스타일”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리듬에 몸을 맡겼습니다. 2020년 BTS가 영어로 부른 “Dynamite”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팬들은 여전히 “봄날”, “피 땀 눈물” 같은 한국어 곡을 더 사랑했습니다. 왜일까요?


가능한 설명들을 검토해 봅니다.


가설 후보들:

❌ 멜로디가 특별하다? → 서구 작곡가 많이 참여

❌ 안무가 뛰어나다? → 많은 K-pop이 서구 안무가와 작업

❌ 비주얼이 강렬하다? → 다른 아시아 아이돌도 비슷

✅ 언어 자체에 무언가 있다 ← 가장 덜 탐색된 가설



2단계: 한글이 뇌에 그리는 독특한 지도

미스터리 1: “ㄱ, ㄲ, ㅋ”의 비밀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기역, 쌍기역, 키읔”입니다. 영어에는 /g/, /k/ 두 개뿐인데, 한국어는 세 개입니다. 전 세계 7,000개 언어 중 이런 삼중 장애음 체계를 가진 언어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개념박스: 삼중 장애음 체계

장애음 = 공기 흐름을 막았다 터뜨리는 소리

평음(ㄱ): 살짝 막고 터뜨림 → 숨소리 거의 없음 → 혀뿌리가 연구개에 살짝 닿는 촉감
경음(ㄲ): 강하게 막고 단단히 터뜨림 → 성대 긴장 → 성대가 단단히 조이는 긴장감
격음(ㅋ): 막고 '폭발'시킴 → 숨 확 나감 → 기류가 확 터지는 폭발감

즉, 한국어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소리를 '촉각'으로 느끼는 것에 가깝습니다.

문 닫는 세 가지 방법:
- ㄱ: 조용히 당김 (click)
- ㄲ: 꽉 누르며 잠금 (slam)
- ㅋ: 확 밀어서 쾅 (BANG!)


미스터리 2: 한글을 읽을 때 우측 BA8이 활성화되는 이유

조장혁 외(2014) 논문 발췌

2014년, 조장희 교수 연구팀은 획기적인 실험을 했습니다.


한자를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한국인 12명을 모집해 fMRI 스캐너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한글 단어와 한자 단어를 번갈아 보여주며 뇌 활동을 관찰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한자를 읽을 때와 한글을 읽을 때 우리 뇌는 완전히 다른 경로를 사용했습니다. 한자를 읽을 때는 브로카 영역(BA 44, 45), 좌측 상두정피질(LSPC, BA7), 그리고 해마방회(parahippocampal area)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는 시각 정보를 곧바로 의미로 연결하는 직통 경로입니다. 마치 그림을 보고 바로 뜻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한글을 읽을 때는 각회(Angular Gyrus, BA39), 좌측 중전두회(BA8), 그리고 하전두 영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좌측 중전두회의 BA8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복잡한 시각적 주의력과 공간 처리를 담당합니다. 왜 한글을 읽는데 이런 영역이 필요할까요?

출처: 조장혁 외(2014) 논문

답은 한글의 독특한 구조에 있습니다. 한글은 자음을 조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고,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이며, ㅁ은 입술을 닫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글을 읽을 때, 뇌는 시각 정보와 동시에 발음 기관의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한글의 2차원 블록 구조입니다. 알파벳은 일직선으로 늘어섭니다. 하지만 한글은 다릅니다. ’ㄱ+ㅏ=가’는 좌우로 결합하고, ’ㄱ+ㅗ=고’는 상하로 결합하며, ’ㄱ+ㅏ+ㅇ=강’은 3차원으로 조합됩니다. 이는 마치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BA8 영역, 즉 복잡한 공간 처리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아이들이 한글을 배울 때 자음과 모음을 따로 익힌 다음, 이를 공간적으로 조합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뇌는 시각, 음운, 그리고 공간 정보를 통합하는 독특한 신경 회로를 발달시킵니다. 이는 알파벳이나 한자를 배우는 아이들의 뇌와는 다른 방식입니다.



3단계: K-pop의 비밀 - 리듬이 언어에 이미 있었다

이제 K-pop의 비밀로 들어갑니다. 한국어가 왜 음악적으로 들리는지, 그 구조적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가설: 한국어 자체가 타악기다


증거 1: 교착어 구조가 만드는 규칙적 박자


한국어는 교착어입니다. 이는 어근에 접미사를 규칙적으로 붙여 의미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먹다’라는 동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먹-었-습-니-다’로 활용될 때, 각 형태소가 정확히 한 음절을 차지합니다. 어근, 과거, 높임, 평서, 종결이 각각 한 박자씩 규칙적으로 배열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4/4박자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드럼 비트처럼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리듬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어는 교착어 = 접미사를 덧붙이는 언어

예: "먹다" 먹 + 었 + 습 + 니 + 다

[어근][과거][높임][평서][종결]

각 음절 = 정확히 1박자 → 자연스러운 4/4 박자 생성

레고 블록을 규칙적으로 쌓으면 자동으로 계단이 생기듯



증거 2: 7개 종성(받침)이 만드는 타악기 효과


한국어의 종성 시스템이 독특한 타악기 효과를 만듭니다.

한국어에는 7개 종성이 있습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ㅇ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폐쇄음 종성 (ㄱ,ㄷ,ㅂ):

미파열 = 소리 안 터뜨림

“각, 밖, 꽃”의 끝이 뚝 끊김

효과: 스타카토 (짧고 분명한 끝)


비음/유음 종성 (ㄴ,ㅁ,ㅇ,ㄹ):

공명 = 소리 울림

“산, 봄, 강, 별”의 끝이 여운

효과: 레가토 (부드럽게 이어짐)


비유: 드럼킷의 두 가지 소리

폐쇄음 종성 = 스네어 드럼 (탁!)

비음 종성 = 킥 드럼 (웅~)


K-pop 프로듀서는 이를 본능적으로 활용:

"밤 (bam) - 하늘 (ha-neul) - 별 (byeol)"

탁! 레가토 탁!


K-pop 프로듀서들은 이러한 특성을 본능적으로 활용합니다. BTS의 “봄날”을 분석해 보면, “보고 싶다”라는 가사에서 ’보’의 받침 없음, ’고’의 받침 없음, ’싶’의 ㅍ 받침, ’다’의 받침 없음이 만드는 리듬 패턴이 멜로디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한국어 자체가 리듬 구조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 3: 의성어/의태어의 음악성


한국어의 풍부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감각적 생동감을 만듭니다.

한국어의 의성어/의태어는 1만 5천 개 이상. 영어는 약 1,500개


더 놀라운 건 체계적 음운 규칙:


평음-경음 대조 = 강도 차이

- 반짝반짝 (gentle twinkle)

- 빤짝빤짝 (intense flash)


모음 대조 = 감정 톤

- 반짝 (밝고 긍정적)

- 번쩍 (어둡고 강렬)


삼중 장애음 = 미세한 뉘앙스

- 팡팡 (가볍게 튀는)

- 빵빵 (단단히 차는)

- 펑펑 (크게 터지는)


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닙니다. 소리 자체가 의미를 시뮬레이션하는 embodied language입니다.

(그래서 찰진 욕도 참 다양한가 봅니다)


BlackPink의 “뚜두뚜두”나 NewJeans의 “Hype Boy”에서 의성어적 요소들이 후렴구를 이루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들은 한국어가 가진 음향적 표현력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소리 자체가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므로,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종합: K-pop이 성공한 이유

한국어의 음절 구조 → 명확한 박자감

종성의 타악기 효과 → 리드미컬한 펀치

의성어/의태어 → 감각적 생동감

삼중 장애음 → 미세한 역동성


K-pop은 “한국어에 음악을 입힌 것”이 아니라

한국어 안에 이미 있던 음악성을 증폭한 것


다음 화에서는 다른 언어들이 어떻게 화자의 뇌를 다르게 형성하는지, Sapir-Whorf 가설, 즉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이론의 현대적 증거들, 앞으로 어떻게 한글을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한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 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글 Ep.3 세종대왕이 설계한 것은 한국인의 사고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