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2년 차 가드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폭염과 쉬지 않고 내렸던 폭우, 꽃들이 숨만 죽이고 있었던 여름 정원이었다. 그리고 9월 말까지 여름의 기운이 계속되면서, 가을꽃은 도대체 언제 피려나,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마당에 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10월이 시작되고, 어느 날 갑자기 북쪽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동안 잠자고 있던 가을꽃들이 폭죽같이 터지기 시작했다.
9월 말에 한 송이 두 송이 피기 시작했던 추명국은 그야말로 만개. 오리지널 추명국도, 겹추명국도 선선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마당 한가운데서 분홍치마를 펄럭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만개한 추명국 옆 또 다른 추명국은 비슷한 시기에 꽃봉오리를 올렸지만, 아직까지 꽃이 필 조짐 없이 얼음인 상태다. 모두 함께 동시에 피었으면 얼마나 더 풍성하고 예뻤을까 아쉬운 마음이 가득, 하지만 역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마당일, 그리고 가드닝이다.
추명국 옆 파란색 층꽃도 두둥실 꽃을 띄웠다. 우리 집 마당에는 파란색과 하얀색 층꽃이 몇 주 있었는데, 하얀색 층꽃은 지난겨울 월동에 실패해 모두 일찌감치 사라졌다. 유일하게 생존해 올 가을에 꽃이 핀 이 층꽃은, 고급스러운 청파랑 빛깔 몇 줄을 마당에 칠해주며 분홍과 흰색의 꽃들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이 층꽃은 올해가 되어서야 자리를 잡은 듯 하니, 내년엔 더 많은 가지와 꽃을 올리며 꽤나 볼륨감 있게 파란색을 마당에 칠해줄 것이다.
가을의 또 다른 파란 선물 토종 솔체도 빛나고 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의 크기가 작다고 무시면 안 된다. 비록 1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꽃 하나하나지만, 이 작은 꽃들이 모여 동시에 가을 햇살을 머금고 빛나기 시작하면, 파란 빛깔의 보석이 한가득 반짝반짝 마당 위를 떠다니는 모습이다.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러면서도 고급진 가을 정원의 1순위 꽃이 바로 토종 솔체.
운남국화가 돌아왔다. 운남국화가 지난여름 동안 꽃이 안 피었던 건 아니다. 이 녀석은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노동 꽃의 대명사지만, 그래도 지난여름에는 힘들긴 힘들었는지 꽃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선한 가을이 되자 하루가 다르게 풍성해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다. 하얀색 바탕에 살짝 노란빛이 도는 우유 버터의 느낌으로, 가을이 되어 완전히 복슬복슬해진 꽃모양을 만들며 우리 집 마당의 반음지 구역에서도 풍성하고 든든하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구절초도 마당에 하얀색을 더하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너무 잡초 같아 보여서, 또 너무 자유분방하게 자라서 뽑아낼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그래도 꽃이 피고 나니 가을마당의 한편을 환화게 밝히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해를 더 받으려고 몸을 잔뜩 비튼 채로 꽃이 피고 있으니, 자리를 잘 못 정해준 주인장 때문에 괜히 구절초만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쓰럽다.
지난여름이 지나고 흰가루병이 심하게 생겨 약을 쳤지만, 이미 때가 늦었는지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지고 있는
백일홍 '퀸 라임 블로치'와 백일홍 '마젤란 살몬'은 거의 끝물인 상태다. 이제 한 달만 더 버티면 올해의 가드닝 시즌도 끝나는데, 흰 곰팡이가 뒤덮여 있는 이 백일홍들을 뽑아낼까 말까 결정 장애의 상태로 가을의 날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반면 150센티 정도의 높이로 엄청나게 키가 커버린 백일홍 '릴리풋'과 키 작은 백일홍 '더블 딥 살몬', 자하라 '라즈베리 레모네이드', 이 세 가지 백일홍은 흰가루병 거의 없이 건강한 상태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이 세 녀석들은 지난 계절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피어 마당의 화려함을 담당하고 있으니, 이 상태라면 10월 말까지도 충분히 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알록달록 점을 찍은 것처럼 하얀색과 살구색의 천일홍이 마당 여기저기에서 최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알사탕 같은 모양의 톤이 다운된 색깔의 천일홍은, 마당에서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친구다. 생명력이 강한 이 친구는 씨앗부터 파종하여 키우기도 쉬우니, 특별한 가을꽃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일단 천일홍을 마당에 채워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름꽃 플록스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지난 초여름부터 지금까지 피고 지고를 끝없이 반복했던 아주 길었던 개화기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플록스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오키드 옐로'가 형광 분홍과 흰색 조합의 강렬한 여름 빛깔로 잔잔한 빛깔의 가을꽃들 사이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지난여름의 기억을 소환해 내고 있다.
10월 초부터는 내년의 정원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시간이다. 가을 정원에서 정원사들이 얼마나 부지런했는지에 따라 내년 정원의 풍요로움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년의 정원을 상상해 보며, 그동안 눈여겨봤던 다년생 꽃들의 모종을 슬슬 마당에 심기 시작했다.
새롭게 심을 꽃은 우리나라 여름의 폭염과 폭우를 견뎌낼 수 있는 강건한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올해의 혹독한 여름을 거치면서 많은 선배 가드너들이 튼튼하다고 적극 추천하고 있는 '하늘바라기'를 심었다 노지월동 잘하고, 폭염과 폭우, 가뭄에도 모두 강하며 비가 와도 잘 쓰러지지 않고, 꽃도 많으며 개화기간도 긴 것으로 소문난 만능의 꽃으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중이다.
다음은 지난 늦은 봄 수크령 모우드리를 들어냈던 자리에 키가 60센티 정도로 자라는 하얀색 중형 꼬리풀 '슈네리신'을 심었다. 70% 정도가 반음지인 2년 차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잘 살아가고 있는 녀석들이 바로 꼬리풀 친구들이다. '긴산 꼬리풀', '꼬리풀 퍼스트 글로리', '베로니카 블루 스트릭', '베로니카 로열 블루' 등 꼬리풀 계열 친구들이 모두 노지월동 잘하고 험난한 여름을 잘 견디며 무탈하게 크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흰색 꼬리풀 '슈네리신'을 다시 한번 믿고 키워 보기로 했다. 가을과 겨울을 거치며 뿌리를 잘 내려 풍성하게 자라나, 올해 들어낸 수크령 모우드리를 대신해 새로운 정원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다.
작년 가을 공구를 통해 들인 '홍지네고사리'가 아주 잘 컸다. 사실 올해 여름의 이런 원시시대 같은 기후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고사리 종류가 정원에 딱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고사리 종류를 찾아보던 중, '개고사리 버건디 레이스'를 발견했다. 와인빛의 고혹적인 색깔로 물들어가는 고사리라니! 그래서 바로 구입해 마당 제일 안쪽의 비어 있는 구석에 심었다.
지난겨울 월동을 잘 못 했는지 올해 봄 심하게 상해 버린 약골 장미 '퀸 오브 하트'. 이 녀석을 뽑아내서 없애버릴까 하다가 일단 버려진 화분에 임시로 옮겨 놓았는데, 어느 순간 슬금슬금 살아나는 것이 보였다. "앗, 미안해! 그동안 키운 정이 있지!" 그래서 다시 잘 키워 보려고 큰 화분을 들여와 새로운 집을 마련해 주었다. 앞으로 너는 이 집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목생을 살아 보렴.
봄의 정원은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가을의 정원은 거칠고 쇠락해 있다. 그러나 봄과 가을 두 계절 모두 꽃들은 반짝여 아름다운 색을 만들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햇살과 상큼하게 스쳐가는 바람은 색색의 꽃들에게 정원사들만이 볼 수 있는 계절의 춤을 선물한다.
그래, 꽃을 키운다는 것은, 정원을 가꾸어 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한 것이지. 혹독했던 지난여름의 피폐했던 정원으로부터 피어난, 완전 럭키비키한 가을의 정원이 지금 눈앞에 있다.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4년 10월 1일~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