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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화 Oct 31. 2024

10월의 마지막 꽃들

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2년 차 가드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벌써 10월의 마지막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때쯤이면 한 해의 정원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마지막 가을꽃들이 남아 마당을 밝혀 주고 있으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공작 아스타'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 흰쑥부쟁이가 만개했다. 초여름에 순지르기를 한 번 해준 이 녀석은 10월 중순이 넘어서야 한 송이 두 송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별 같은 하얀 꽃들이 잔뜩 내려와 쑥부쟁이 한 그루를 가득 덮었다. 순지르기 후 새로 나온 가지들이 너무 사방팔방 정신없이 뻗어 나가서 이 녀석을 뽑아낼까 말까 눈에 가시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토록 하얀 별이 가득하니, 10월 말의 꽃 보석은 단연 흰쑥부쟁이라 말할 수 있다.      

흰쑥부쟁이가 별처럼 내렸다


백일홍 최후의 생존자는 '자하라'와 '더블딥 살몬'이다. 역시 키가 좀 작은 꽃들이 건강하고, 오래 버티고, 생명력이 강하다. 갈색과 회색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가을마당에서, 기온이 내려가면 갈수록 더 밝고, 선명하게 빛나는 이 친구는, 다양한 색깔의 전구가 되어 마당을 빛내주고 있다.


천일홍은, 꽃이 천일을 간다고 해서 천일홍인 것처럼 정말로 몇 년이고 충분히 버텨낼 모양새다. 바스락바스락 녹지 않는 종이로 만들어진 듯 한 천일홍의 사탕 같은 꽃은, 이대로 쭈욱 마당에서 반짝거린 후 서리가 내리고 초겨울이 시작되어야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바스락 거리는 질감의 천일홍 꽃


하루 이틀이면 꽃잎이 다 떨어질 것만 같은 하늘하늘한 추명국은, 서리를 기다리는 꽃 '대상화'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다. 꽃이 지는 만큼 새롭게 다음 꽃이 피면서 가을마당의 고움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월 중순까지 피지 않아 마음 졸였던 또 다른 추명국도 본격적으로 개화를 시작했다. 덕분에 추명국이 두 배로 되면서 럭키비키한 가을마당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가을 정원 분위기를 물씬 만들어 내는 일등공신은 역시 그라스다. 마당 한쪽 구석의 '그린라이트' 그라스가 줄기가 툭하고 꺾이더니 꽃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햇빛을 머금고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그라스의 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갈대가 된다. 내년엔 이런 꽃을 심어야 하나, 저런 꽃을 심어야 하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의 마음이다.      

그린 라이트 그라스의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드닝을 시작하기 전 장미는 5월에만 피는 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장미는 대부분 봄에도, 여름에도, 그리고 가을에도 핀다. 이렇게 만나는 가을 장미는 지나왔던 한 해의 정원 모든 것을 화려하게 불사르는 느낌이다.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 곧 다가올 서리에 스러질 아름다운 가을 장미 때문에 정원은 더 안타깝고 더 처절하고 아련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장미로 가득한 내년 봄의 새로운 정원을 더욱 만나고 싶은 기다림을 불러일으키는 가을의 장미다.     


아직도 피어있는 꽃이 있지만 슬슬 올해의 마당 마감을 시작했다. 백일홍 '퀸 라임 블로치'와 백일홍 '마젤란 살몬'을 정리했다. 6월 첫 주에 마당에 심어 10월 말까지 백일을 넘어 무려 5개월 동안 끊임없이 꽃을 피우며 제 몫을 충분히 해주었던 꽃들이다. 혹독한 여름을 거치며 마지막은 흰곰팡이병으로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작별을 하는 순간까지도 꽃을 피우던 녀석들이었다.     


행잉 화분 위의 원평소국도 정리했다. 지난 4월 초에 행잉에 심은 원평소국 역시 4월부터 8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개화하며 공중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다른 가드너들은 이 녀석이 주위에 너무 많은 씨를 뿌려 퇴출시킨다고도 하지만,  이대로 그냥 보내주기가 아까워 일단 마당의 땅에 심어 두었다. 이 녀석의 다음 행선지는 내년에 한 번 더 꽃을 보고 그다음에 고민하기로.

행잉 화분에 심어져 있던 원평소국을 땅으로 옮겨 심었다

 
구절초도 정리했다. 여기저기 번지고, 햇빛을 쫓아 웃자라고 휘어져 자라는 모습 때문에 미운털이 어느 정도 박혀 있던 녀석이었다. 가을비를 한 두 번 맞더니 파김치가 되어버려, 이 기회에 싹 뽑아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 자리에는 폭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한여름에도 잘 버티고 향기도 좋은 키 1미터 정도의 백합 구근을 심어볼까 고민 중이다.     


루꼴라를 키워 먹는다. 이 친구는 일 년에 두 번, 봄에 한 번 씨뿌리면 여름까지 따서 먹고, 한여름에 잠시 쉬었다가 가을에 씨뿌리면 초겨울 전까지 또 수확해 먹을 수 있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있어 이렇게 루꼴라도 키워 먹고, 바질도 키워 먹고, 고수도 키워 먹는 호사를 누리니, 요즘 같이 채소의 가격이 하늘로 치솟고 있는 이때에 무엇인가 가계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이것을 핑계로 옆지기에게 꽃모종을 더 사달라고 하면 허락을 해줄까?

플랜트 박스에서 자라고 있는 루꼴라


이제 24년도 가드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꽃들은 모두 사라지고, 잎은 떨어지고, 줄기도 회색빛으로 변하는 시간이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다가올 겨울을 슬프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건 땅속에 꽃들의 건강한 뿌리가, 건강한 씨앗이, 그리고 우리들의 건강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4년 10월 16일~10월 31일)

10월 말의 미니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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