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싸우고, 많이 행복하세요.
결혼한 지 햇수로 10년.
사실 우리 부부는 다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머머, 뭐야 뭐야, 하시겠지만) 금술이 너무나 좋아서도, 바다와 같이 넓은 이해심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넘어오지 않는 적당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숨이 쉬어지도록, 그냥 그렇게 적당한 거리만큼 적당한 신경을 끄며 살고 있습니다.
좋게 표현하면 쿨내가 진동해서 언뜻 세련돼 보이기도 하고, 배려와 매너가 넘쳐 요즘 라이프 스타일대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음,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너무 멀어져 버린 건 아닐지,
이제는 남편의 이야기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어찌 된 일인지 들어도 도통 기억에 남질 않습니다. 주로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대화의 전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고요.
모르긴 몰라도 가정이며 직장이며 각자의 자리를 치열하게 지켜내려고 애쓰다 보니 가정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노력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걸까요? 어찌 됐든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한 번이 있을까 말까 한 저희는 그런 부부입니다.
무덤덤하게 지내왔지만 이따금씩 느껴지는 건조함이 마음에 걸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듯한 암묵적인 분위기가 좋았고, 속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뭐하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남편이 한편으로는 고마웠습니다. (지적 포인트가 참 많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는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아내가 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원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으니, 아이처럼 재잘재잘 말이 많고 살가운 스타일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신혼부부처럼 시시콜콜 이런저런 감정들을 살갑게 나누고 싶었던 때가 저한테도 있었더랬죠. 하지만 아쉽게도 둘은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비슷한 온도를 가진 저희는 제 바람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습니다.
몇 번쯤은 그런 애씀의 (?) 시간을 가질 만도 했지만 상황은 한 술 더 떠서 결혼 후 초반 몇 년은 서로가 해외로, 지방으로 잦은 출장을 다녔던지라 자연스럽게 서로의 거리에 익숙해지며 자연스럽게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금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애정표현이나 사사로운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참고 참아온 인내와 고단함의 한계가 끝에 닿을 때쯤, 눈 딱 감고 한바탕 화를 해봄직 한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들 또한 이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은 저를 다잡고 참아내기를 반복하며 무던함으로 포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기대한 어른스럽고 성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친구들에게는 수다쟁이가 되지만 남편에게는 유독 예의를 지켰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퍽이나 우아하게 백조처럼 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억울하지나 않지)
며칠 전,
고요하던 우리 집은 난생처음 드라마에 나올법한 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저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주었던 그 장면.
찰지게 김치 싸대기를 올리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제 손에 김치만 없을 뿐, 부들부들 분이 차서 파르르 울며 소리를 지르는 제가 있었습니다. 남편 역시 연애 기간을 포함 12년의 시간 동안 저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저와 똑 닮은 포악한 표정으로 마주 서 있었고요. 말 그대로 두 인물이 아주 갈등에 찰떡인 자세로 곧 와장창 한바탕 소리가 나기 직전의 상황 설정이었죠.
사실은 이 사건의 중심에는 시댁이 있습니다.
(자세히 쓰자면 글이 산으로 갈 확률이 높아 이하 생략합니다.)
시댁에서의 블라블라...
저는 그렇게 10년간 무미건조하게 지켜내 온 저의 매너와 이성을 그날 한순간에 놓아버렸습니다. 한 밤 고성이 오가며 난생처음 서러운 울분에 악을 쓰며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던 저의 바락바락 기술은...
(다시 생각해도 참 가관입니다) 쩝-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필터링 없이 토해내고 나니 와- 정말 이런 게 분노의 해소라는 건가? 다시 생각해봐도 악에 바쳐 부르르 떨며 괴성을 지르고 있는 저는 제가 봐도 무서울지경이었으니까요.
그날 밤 저는 결혼 후 최악의 밤을 보냈습니다.
많이 놀랐고, 많이 울었고 또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그간 참아내는 재주는 자랑할만했는데 그날은 유독 왜 그렇게 분이 나서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는지.
폭풍 같던 밤을 보내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끓어오르던 분노도 자연스레 잦아들고 요동치던 감정의 파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습니다.
갈등의 원인이 된 서운함과 서러움을 빠짐없이 퍼부은 탓인지 마음이 맑아진 듯했습니다.
그런데 속이 아주 후련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어제와 오늘 마음이 예상과 다릅니다.
일상을 보내는 내내 공허하다고 할까요?
쓸쓸하다 못해 조금은 쓰린 것도 같습니다.
그냥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다시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켜켜이 쌓아두었으면서 아닌 척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진 사람이었습니다. 화가 나고 속상하고 서운하고 외로운 감정들, 기쁘고 고맙고 감동스러웠던 모든 순간들을 어른스럽다는 겉치레로 가려두었습니다.
이해심 많은 척-
매너 있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뭐 그런 류의 척척척.
그냥 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과 한바탕 하며 지지고 볶고 애증이 묻어나는 부부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 걸.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화해하고, 그렇게 좀 더 보여주며 살 걸. 그게 지금의 우리보다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마음에 내려앉습니다.
예의를 차리고 배려라는 이름에 서로의 공간을 철저히 지켜주고 그렇게 거리를 두다 보니 점점 서로에 대한 관심과 마음은 멀어져 버리고 결국은 점점 말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또 각자의 길을 가는 우리가 꼭 평행선 같아 슬퍼졌습니다.
어느 유명한 클리닉에서 "당신들의 행복은 가짜입니다" 진단이라도 내린 듯 허무하고 허탈해 이렇게 보낸 10년이 후회스럽기까지 합니다.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분노는 이제 사라지고 없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아쉽고 후회스러운 생각이 여운처럼 며칠밤을 맴돌며 저를 더 외롭고 만들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서서히 쌈닭이 되어보기로 합니다.
남편에게만큼은 솔직하게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다 혹 다툼이 생기더라도 불화가 아닌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고 봉합이 되는 과정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면 그 부부싸움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충분히 연애했고 내가 선택한 남자여서 제가 놓치고 있었습니다.
만들고, 다듬고, 수정에 수정을 거쳐 완성품이 나오듯, 부부관계도 그렇게 수정하고 고쳐가야 했다는 걸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방향을 바꿀 줄 아는 용기를 오늘부터 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 진실된 마음이 닿는 사이가 될 수 있도록, 예의보다는 의지를 할 수 있는 부부가 되도록.
제가 다짐한 우리 부부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인 거겠죠?
아, 물론 남편은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