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1
다소 시니컬한 시선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SNS를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 중에 MBTI 검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경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 년 전 한바탕 다시 유행을 타며 관련 포스팅이 줄을 이었고, 원래의 의의에서 확장된 콘텐츠들까지 인기를 끌며 어딜 가나 준전문가를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실은 나도 냉소적인 눈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80억이 넘는 사람들을 16개의 유형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너무 섣부르고 가벼운 선언이 아닌가. 흘긴 눈은 M의 이야기를 들으며 풀어졌는데, 자신의 MBTI 결과를 읽으며 왠지 유하 너도 같은 유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호기심이 동해 그날로 검사를 해보니, 정말로 INFJ가 나왔다.
그 후로는 튜브를 타고 여름 바다를 즐기는 사람처럼 유행에 푹 빠져 지냈다는 이야기. 내 유형에 대한 이런저런 분석도 흥미로웠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MBTI가 산뜻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누군가 다른 자세로 접근할 때, 서로의 MBTI를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매번 신기하고도 재밌었다.
며칠 전 MBTI 검사를 다시 했다. 나에게 더 가까운 보기를 고민하며 이번에는 아마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왠지 더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고, 감정보다 사고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INFJ. 결과지를 읽어보니, 선택지를 두고 곤란해했던 것조차도 내 유형의 특징인 듯했다.
결과지에서 재밌게 읽은 부분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관련이 없는 상세 자료를 강박적으로 조사하거나 TV 시청, 과식과 같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감각 활동에 과도하게 몰두한다는 진술이었다. 실소가 터졌다. 그건 정말 지난 주말의 내 모습이었으니까.
지난 토요일, 나는 종일 집에 틀어박혀, 예전에도 몇 번이나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돌려보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집어먹었다. 배가 부른 걸 넘어 목까지 꽉 찬 느낌이 들었을 땐 뜨개질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생각할 틈은 만들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머리맡 스탠드를 끄자 비로소 억눌렀던 판단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를 이렇게 날리다니.
며칠 동안 후회에 허덕였지만, 검사 결과지를 읽으며 마음이 스르르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지난 주말은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었다는 증거였으니. 자책 이전에 내 마음을 돌봐야 할 때였다. ‘스스로가 싫지도 부끄럽지도 않을 때, 내가 나인 것이 다행스러울 때 좋은 것들은 그제야 불쑥 찾아옵니다.’ <우리는 시를 사랑해> 100호 속 박준 시인의 말이 마침 더 와닿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나뭇가지마다 이파리가 제법 많이 자라 있었다. 어제도 그저께도 지나친 나무들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싱그러운 초록이었다. 좋은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