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말할 수 있어, 나 호구였다고

[ Hogu Series ] EP. 01 괜찮아 호구

by 마리엘 로즈


오늘도 나는 괜찮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

나는 '착하다'는 말을 참 좋아했다


착하다는 건,

선생님이 웃으며 칭찬해주고,

엄마가 "우리 애는 걱정 없어"라고 자랑하고,

친구들이 "너 진짜 좋은 애야"라고 해주는,

그런 만능 칭찬 카드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주 열심히

"참을 줄 아는 아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

"분위기를 깨지 않는 아이"

코스를 이수했다


어릴 적 꿈?

공기청정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맑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싫어.'

'안 하고 싶어.'

이런 말은 내 사전에 없었다

있었다 해도,

꺼내는 게 무서워서 꾹꾹 눌러 담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무엇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어른들이 기대하는 '착한 아이'로 살아갔다


울어도 "괜찮아요."


억울해도 "괜찮아."


배고파도 "괜찮습니다."



괜찮음 3종 세트를 몸에 장착하고,

하루하루 착한 아이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그래도 스스로 선택한 손해는 괜찮았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희생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 납득한 선택이었으니까.

오히려 따뜻했다


그것이,

자발적 착함이었고,

자발적 호구였다


내가 선택한 손해에는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착함이 다 따뜻한 건 아니었다


거절이 두려워서,

어색해질까 봐,

상대방의 실망한 얼굴이 무서워서.


나는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

"그래, 그렇게 하자."


진짜 내 마음은 '싫어'였지만,

공기를 무겁게 만들기 싫어서,

조용히 나를 눌러 삼켰다


그 착함은,

배려가 아니라, 회피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회피적 순응(avoidant compliance)

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

자신을 억누르는 행동.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싫어"라고 하면 미움받을 수 있어.

"참아야 모두가 편해진다."

"갈등은 나쁜 거야."


그래서 참았다

그래서 맞췄다


착해서가 아니라,

편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피하는 데 급급했던 나에게,

스스로 호구가 되는 것까지 감수할 여유는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미움받기 싫어

회피성 호구가 되기에도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다르게 살아가려 한다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나로 서기 위해.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손해라면 괜찮다

내가 이해한 선택이라면,

그 안에서도 나는 나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에 끌려가는 착함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려 한다



진짜 착함이란,

내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누구의 기대에도,

누구의 눈치에도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선택하는 것.


흔들려도 괜찮다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


중요한 건,

세상의 중심에 나를 세우고,

언제든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나는 이제 안다


먼저 나를 껴안을 수 있어야,

비로소 누군가를 따뜻하게 감쌀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조금 서툴러도,

조금 느려도,

먼저 나를 품어주기로 했다


오늘도,

"괜찮아?"라고 묻는 세상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한다


"아직 괜찮진 않아.

그치만 괜찮아질 거야."


...


《 괜찮아 호구

오늘도 가볍게 웃으며,
내 마음을 안아본다.




만약 마음과 달리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그 아이가 여전히 ‘혼나지 않으려’ 애썼다면..

→ [EP.02 나는 규칙대로 했을 뿐인데, 왜 나만 피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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