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만 입에 달고 살던 나에게

[ Hogu Series ] EP. 03 미안병 호구

by 마리엘 로즈


나의 "미안합니다"는 '안녕하세요'와 동급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처럼 사용해왔다

길 가다 누군가랑 눈이 마주쳐도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칫해도
"죄송합니다."

컵을 조심조심 들고 가다가
누군가 스치기만 해도
"죄송합니다."

심지어,
내 생일에 친구들이 축하해주러 왔을 때조차
눈치가 보여
"바쁜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늘,
카드를 잘못 꺼내는 사람이었다

가족에게는 미안해야 할 때도 오히려 당당하고,
타인에게는 미안할 필요 없는 순간인데도

죄인처럼 굴었다




어떤 날은 이랬다

버스를 잡아타려고 죽어라 뛰었다
뒷문이 다 닫히기 직전,
온몸을 던져 겨우 올라탔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 안으로 들어섰는데,
운전석에 앉은 버스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나를 째려본다

"너 때문에 출발 늦었잖아."
하는 그 눈빛.

나는
토끼처럼 놀란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죄송합니다..."
를 중얼거렸다

(아니, 아저씨가 문 열어준 거잖아요...)



만원 지하철 문 앞에 서 있었다.
서고 싶어서 선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비켜주세요" 소리와 함께 째려본다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마치 내가 자동문 센서라도 되는 양

비켜주고, 사과하고, 눈치 보고.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눈치껏 살아야 하는 건데.)




친구랑 약속을 잡았다.

친구는 늘 20분, 30분씩 지각한다
나는?
어쩌다 한 번 늦었다

친구 얼굴이 굳어 있다

나는 허둥지둥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를 외쳤다

(아니, 나 겨우 5분 늦었는데...)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모르니까 물어봤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많이 바쁘시죠..."
라고 사과부터 했다

(모르면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봤는데,
왜 미안해야 하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일도 아닌데
"이것 좀 대신 해줄 수 있어?"하고 부탁하길래,

나는 마지못해 웃으며 "네..." 하고 맡았다.

근데 그 일은
내가 잘 모르는 거였고,
역시나 작은 실수가 났다

그러자,
돌아온 건 다그치는 목소리.

"이걸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리고 역시나 한마디,
"죄송합니다..."
를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게 누가 부탁하래!)



그렇게 나는
존재하는 것 자체를 미안해하는 호구가 되었다

작게, 빠르게, 조심스럽게
"죄송합니다"를 꺼내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해야 하지?"

나는 버스를 잡아탄 것뿐이다
나는 문 앞에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늦을 수도 있고, 물어볼 수도 있다

살아있다는 건, 죄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연습한다

"죄송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를 꺼내는 연습.

"죄송합니다" 대신,
"괜찮습니다"를 꺼내는 연습.

그리고,
조용히 내 마음을 다독인다

"괜찮아.
너는 그냥 있어도 괜찮아."

너는 그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존재야.



...


《미안병 호구》

오늘도,
나는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준다.





"내가 너무 유연해서, 결국 내 경계선이 없어진 거야."
→ 《팔색조 호구》는 그 경계선을 다시 그리는 과정입니다. 상담실에서 시작된 진짜 호구 탈출기.

[EP.04 눈치를 보는 만큼, 내 마음은 무너지는 걸까]
https://brunch.co.kr/@15b2cc4a3f7344c/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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