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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Apr 12. 2023

널 고아원에 버리려고 했어

엄마 인터뷰 1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은 안 했냐』는 6070 큰언니들의 인터뷰집으로 당시 가부장적이고 극심한 성차별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마치 모든 글이 살아 움직이는 거 같았다. 그리고 생각나는 한 사람


엄마

우리 엄마


그 단어만으로도 눈물버튼이라 쉽게 글로 옮길 수도 없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서야 용기가 생겼다. 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용기가...


처음 엄마에게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무슨 인터뷰라며 정색하셨다. 게다가 지난 과거 엄마 삶의 이야기라니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따위 왜 물어보냐며 얇은 웃음을 짓는다.


"그냥, 책을 읽다가 엄마 생각이 났어. 난 다른 사람 이야기는 책을 통해 많이 들어봤는데 정작 가장 가까운 엄마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잖아."


"뭐 좋은 일이 있었다고, 그땐 다들 힘들게 살아서 고생한 이야기 밖에 없지."

"그래도 행복한 어린 시절이 있었네."


그렇게 시작된 엄마 인터뷰




유독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발이 땅에 닿을 틈도 없이 모든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당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늘 좋은 옷과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에게 불행이 찾아온 건 한 순간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후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은 9살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점점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쯤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나에게도 엄마가 다시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던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뒤 바꿀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랐다고 하는데 어떠셨어요?

친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행복했지. 아직도 기억나 국민학교 입학식 때 가죽가방 메고 맞춤옷에 가죽신발 신고 학교에 갔거든. 모두가 다 부러워했지. 그런데 새어머니가 들어오면서 한순간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어. 에휴 이 이야기하면 뭐 하겠어. 속만 상하지. 난 정말 학교도 잘 다니고 내가 꿈꾸던 일도 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야 했어. 쫓겨났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서울로 보내져 남의 집 식모살이라는 걸 하게 됐지.


식모살이라니 이제 겨우 국민학교 나왔는데 믿기지 않아요.

학교도 더 이상 못 다니게 하고 이제 겨우 13살 어린아이를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으로 보냈지. 밤마다 가족이 보고 싶어 매일 울었어. 게모도 엄마라고 그 당시에는 보고 싶더라. 그런데 동생이 너무 걱정 됐어. 새어머니의 구박과 학대를 견뎌내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나더라고. 그때 내가 동생을 돌봤어야 했는데, 니 이모 한쪽 귀가 먼 것도 새엄마의 폭력때문이거든. 혼자서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할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불쌍한 분이지. 새어머니랑 매일 싸웠어.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나를 보냈지만 그땐 그냥 가족이 너무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


너무 어린 나이인데 그럼 언제까지 남의 집에서 일하셨어요?

일한 지 6개월 됐나 그 집에 천 원이 없어졌는데 내가 훔쳐갔다며 도둑년 취급을 하는 거야. 당시 천 원은 큰돈이었거든. 난 그 돈을 본 적도 없고 겁도 많아서 설령 봤다고 하더라도 가져갈 생각도 못했을 거야. 그런데 나를 어찌나 몰아세우던지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벌벌 떨어야 했지.


정말 너무 억울하셨겠어요.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지 주인이 그렇다는데, 그 집에서 일하는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인데. 결국 그 집에서 나와 간신히 소식이 닿은 육촌 언니 집에서 지내게 됐어. 당시 육촌언니가 관광버스 안내원이었는데 어느 날 관광버스 안내원을 해보지 않겠냐며 학원을 끊어주더라고. 당시에는 자격증을 따야 버스 안내원을 할 수 있었거든. 그렇게 육촌언니의 도움으로 17살에 관광버스 안내원 겸 가이드가 돼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어. 학생들 단체 여행 가이드도 하고 영화배우들 태우고 촬영장도 다니고 그때 참 재미있었지. 매일 여행 다니는 기분이었어.


당시 엄청 예뻤었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이렇게 늙어 보잘것없지만 젊었을 때 정말 이뻤지. 당시 전국관광안내원 미인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5등 했어. 내가 키만 좀 컸어도 1등 했었는데 말이야.


직장동료들과 함께 (가장 왼쪽이 엄마)


인기 정말 많았겠어요.

따라오는 남자들이 많았지. 그러다 고려대 학생과 연애를 하게 됐는데, (너한테 별소리 다한다며 웃는 엄마)

서로 참 좋아했어.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집 부모님께 소개를 시켜주고 싶다는 거야. 망설이다가 가게 됐는데 그 집 대문 앞에서 더 이상 들어가질 못하겠더라. 집이 너무 으리으리하더라고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부잣집처럼 생겼는데 그 큰 대문이 마치 나를 호통치는 거 같았어. '너 같은 게 감히 여길 들어오겠다고'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어. 내 주제에 무슨 대학생을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다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때 그분이랑 잘 됐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다.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잖아.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한 참 후에 지금의 니 아빠를 소개팅으로 만났지. 대구사람이라 무뚝뚝하고 멋대가리도 없었지만 키도 크고 잘생겨서 호감이 가더라. 그런데 연애를 하다가 덜컥 니가 생긴 거야. 부모님께 결혼 허락받으려고 갔는데 배운 거 없고 근본도 없다고 어찌나 반대를 하던지 특히 니 할아버지가 극 노했지. 사실 니 아빠가 고아나 다름없었거든. 당시 전쟁 후 모두가 피폐한 삶이었으니깐 결국 니 아빠 생모가 고아원에 맡기고 떠나버렸어. 거기서 학대와 폭력,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결국 어린 나이에 도망쳐야 했지.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깐. 나도 할아버지가 버린 거나 마찬가지면서 뿌리가 없다며 니 아빠를 내치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거기다 임신까지 한 나보고 애 낳으면 고아원에 보내버리라는 거야. 그 길에 당장 니 아빠랑 나와서 할아버지 집과 먼 지금의 부산으로 가게 된 거야.


나 고아될 뻔했네.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그때 할아버지 원망 많이 했어. 그런데 더 고통스러웠던 건 가난이었어. 둘 다 가진 거 없이 부산 내려왔는데 그나마 조그만 방 하나 얻을 돈을 택시에 두고 내린 거야. (왜 나쁜일은 한꺼번에 오는지) 그때 정말 막막하더라. 땡전 한 푼 없이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맨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니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더라구.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를 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무섭더라. 그래서 사실 니 아빠랑 헤어지려고 했어. 그걸 안 니 아빠가 어디서 수면제를 잔뜩 구해와서는 너를 안고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셋이 같이 안고 한참을 엉엉 울었어. 그때 결심했지.


'그래 죽을힘으로 살아보자'


그리고 엄마의 고된 일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오로지 우리 가족 등 따숩고 비 막아줄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엄마 인터뷰 2 예고
오로지 돈을 벌어야한다는 목표 하나였다. 봉투 붙이기, 낚싯바늘 꿰기, 와이셔츠 실밥 제거하기, 연탄 나르기, 막노동, 건물청소등 고된 노동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그 노동을 무시하고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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