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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Apr 10. 2023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인생 자체가 명함인 큰언니들의 삶

새벽 4시, 어김없이 주방 불이 켜지고 아이 셋의 도시락과 아침 밥상을 차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있다.


'아침밥 꼭 묵고

도시락 잘 챙겨가라

학교 잘 갔다오고'


무뚝뚝한 듯 휘갈겨 쓴 쪽지가 밥상 위에 놓여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3남매는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억지로 밥을 입에 욱여넣고 각자 도시락을 챙겨 하나 둘 등굣길에 나선다. 마지막으로 나서는 어린 막내는 몇 번이나 문 잠금을 확인하고 나서야 열쇠가 달린 목걸이를 야무지게 목에 건다. 그렇게 우리 집은 수년간 새벽 4시 기상, 새벽 5시 출근하는 엄마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이 식탁 위 쪽지와 도시락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던 엄마,

집안 일과 바깥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노동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로 불려 온 우리들의 어머니,


그땐 몰랐지만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알게 된 진정한 언니들의 삶

인생 자체가 명함인 6070 큰언니들 인터뷰집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이다.



'장남에게 부담 주지 말아라', '남동생에게 양보해라',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거들어라', '여자가 재주 많으면 안 된다' 등의 이유로 장남과 남동생을 위해 학업도 포기하고 그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식모살이와 공장을 전전해야 했던 그녀들. 자신의 쓰임이 다할 즘 얼굴도 모르는 이와 결혼해 시부모에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한다.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 거기에 농사까지 해야 했던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삶은 지금 상식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고된 삶이었다.


10대에 여공으로 일을 시작해 20대에 엄마가 돼 가사노동을 도맡았고 30대에 다시 공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40대 외환위기를 겪으며 비정규직이 됐고 50대 이후부터 청소•요양•간병 등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 _책 속에서


필수노동자 4명 중 1명은 60세 이상 여성 노동자로 6070 여성들이 모두가 꺼리는 적은 임금, 열악한 근무환경, 불안정한 일자리인 '필수노동' 현장을 떠받치고 있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사회가 마비될지도 모를 노동의 현장을 우린 얼마나 낮잡아 보고 하찮게 보아왔던가. 인터뷰어의 말처럼 마치 집을 꾸리고 지켜온 것처럼 고령층 여성들이 이 사회를 꾸리고 지켜온 건데 말이다.



평생 일해 왔지만 집에서 놀면서 네가 하는 게 뭐 있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일하는 여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당당히 살아온 큰언니들의 인터뷰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연 하나하나가 대하소설이라 마치 책 몇 권을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며 밤낮으로 일해온 엄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그 고된 세월 뒤 두 번의 어깨 수술과 불면증으로 아픈 노후를 보내고 있는 엄마. 그 와중에 몸이 안 좋아 김치도 담가주지 못한다며 미안해하신다. 인터뷰에 실린 모든 여성들,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어쩜 이리 한결같으실까.


한식조리사, 맏언니, 맏며느리, 노인 요양보호사, 육아전문가, 돌봄 전문가, 서예가, 원단공장 기술직, 가사노동자, 자원봉사자, 문화해설사, 여성복 디자이너, 그동안 제대로 된 명함 하나 가져본 적 없지만 돈 버는 노동의 사이사이 돌봄과 가사노동도 쉰 적 없는 큰언니들의 삶 자체가 명함이었다.



멋지다. 언니들

흔하디 흔한 이야기라지만 나에게 하나하나 너무나도 특별했던 이야기.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


나도 엄마의 인터뷰를 하고 싶어 전화기를 들었다가 차마 번호를 누르지 못했었다. 당장 엄마라고 불러도 눈물이 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린 그때의 나는 그 새벽 엄마가 있던 그곳에 서있다. 그리고 엄마의 삶을 이제 들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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