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와 이저
[d]azzling stranger
[u]nforgettable mo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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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forgettable moments
(3)
"아, 망했다."
엎질러진 화분이 러그 위로 울컥, 흙을 토해냈다. 불편한 자세로 집중하던 이저의 엉덩이 때문에 중형 화분이 밀려나서였다. 쏟아진 흙을 한줌 집어든 이저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건 나중에 치우자."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자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나왔다. 죽겠다, 죽겠어. 그는 손에 묻은 흙을 마저 털어내고 행동을 재개했다. 손전등 불빛이 들쭉날쭉한 서랍장 곳곳을 비추었다.
"이건 아니고. 아~ 이것도 아니고."
물건 사이를 뒤적거리는 손놀림이 몹시 분주했다. 어느 서랍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그는 일단 눈에 닥치는 대로 끄집어냈다. 그러자 식탁 한켠에서 즉흥 모임이 시작됐다. 다회 용기, 스테인리스 냄비, 대나무 도시락 통…. 다들 무슨 이유로 불려나왔을까.
팔짱을 낀 이저의 고개가 기울었다. 한동안 부엌에서 고민의 신음이 이어졌다.
"그래서. 거기가 지금 몇 년이라고?"
"아까도 말했잖아."
"안 믿겨서 그래."
"2023년이요."
"23? 징그럽다. 무슨 시간이 그렇게 흘렀대?"
이모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단조는 막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모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1998년에는 우리 이모도 브라운 립스틱을 발랐구나. 얇고 각진 눈썹도, 두꺼운 머리띠도 모두 이모를 위한 유행 같았다.
"시공간이 왜 겹친 걸까요. 입에 올리니까 더 미친 소리 같네."
"글쎄. 근데 내가 너보다 똑똑하잖아. 그래서 생각해보건대 아무래도 미래의 내가 얘랑 했던 약속을 까먹은 모양이야."
"그래서요?"
"음~ 그래서 98년의 나를 불러낸 게 아닐까?"
"쟤가요?"
두 사람의 눈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럭키에게 꽂혔다.
"응."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데요?"
"그거야 모르지. 근데 23년의 내가 도대체 뭐에 정신이 팔려서 약속을 까먹었을까?"
"아. 이모 지금 이탈리아 갔어요."
"이탈리아?! 나 설마 이탈리아 남자랑 재혼한 거야?"
단조가 말 없이 이모를 응시했다.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요. 그냥 여행."
"아~ 여행? 뭐, 여행 좋지~"
수긍하던 이모가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
"야야, 여행 중에 만나나 보다. 푸하하!"
"이모는 옛날부터 로맨스 광이었네."
"그럼~ 로맨스는 내 인생이지."
제일 재밌는 게 사랑 아니겠어? 라던 이모의 말투에서 90년대의 정취가 느껴졌다. 단조는 그런 것 같기도 하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발을 까딱거리며 잠시 말이 없던 이모가 대뜸 눈을 반짝였다.
"근데, 아까 그 사람은 누구?"
"에?"
"친구? 애인?!"
"밖에 저분이요?"
"'저분?' 호오, 컨셉인가."
"그냥 친구…? 이웃…?"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는 단조가 이모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일부러 과장을 보태 약도 올렸다.
"별로 웃긴 얘기는 아닌데."
"야야, 생각을 해 봐. 너 지금 몇 개월인 줄 알아?"
이모가 장난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말했다.
"24개월이야. 말 끝마다 '아니야, 아니야' 하는 똥쟁이라구."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하는 말. 그닥 현실 같지는 않았고 그저 부풀린 거짓 같았다.
"똥쟁…. 그래서 웃은 거예요?"
"당연하지. 너 같으면 안 웃기겠니? 쪼끄만 똥쟁이가 애인 만난다는데."
"아니, 난 애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엉~ 미안하다~"
24개월 아기한테 하는 말투로 20대의 단조를 달랠 수는 없었다.
"이모는 제가 단조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너희 엄마랑 너랑 똑같이 생긴 거 알지. 내가 질리게 본 얼굴이야. 모르는 게 바보지."
별거 아니라는 듯한 이모의 태도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나 그때 가면 많이 늙었니?"
"…?"
"23년의 나 말야. 많이 늙었냐구."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한 단조가 입을 벙긋거리는데 뒤에서 방문이 열렸다. 뭔가를 숨겼는지 등 뒤로 팔을 감춘 이저가 자신 없는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늙긴 뭘 늙어요. 여전히 날아다녀. 걱정 마요."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었다. 2023년의 이모는 굳셌고 지혜로웠으며 아름다웠으니까.
멀리서 머뭇거리는 이저에게 단조는 다가가 말을 붙였다. 찾느라 고생했다, 뭐 골랐냐 대화하는 둘을 지켜보던 이모가 흐음, 콧소리를 냈다.
"대답이 살짝 늦었는데."
괜스레 목주름을 살피던 이모 앞으로 뭔가가 건네졌다. 멀뚱멀뚱. 이저를 올려다본 이모의 표정은 이게 최선이었냐고 물었다.
"심심하면 바깥 구경하라고 골라봤어요."
급하게 달라붙는 변명이 웃겼다. 이저가 들고 온 물건은 유리로 된 밀폐 용기였다. 럭키를 숨겨 줄 불편하고 투명한 사각의 유리 요람.
"숨은 쉴 수 있을까?"
단조의 고민에 럭키를 대신한 대답이 돌아왔다. '숨을 쉬어야만 사는 애는 아닌 것 같으니 그건 괜찮은데.' 이모는 본론을 덧붙였다.
"데리고 다닐 거야?"
"다른 거 더 찾아볼게요."
"아니야, 아니야. 그냥 여기 있어요."
일 더 시켰다간 사람 하나 잡게 생겼어. 이모는 이저의 하얀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행이다!"
이모가 신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기에 단조는 급 불안해졌다. 어떤 폭탄 발언이 나올지 뻔했으니까.
"잘생긴 남자는 계속 태어나나 봐. 정말 다행이지 않아?"
"98년에도 이런 얼굴이 있나 봐요."
이저가 능청을 떨었다. 기력이 떨어져서 피곤에 찌든 얼굴이 할 말은 아니었다.
"쫌만 일찍 태어나지. 나랑 재밌게 놀았을 텐데."
"이모!"
화들짝!
심벌즈 같은 단조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얌전히 있던 럭키가 색색깔로 부글부글하더니 탄성 좋은 공처럼 방안을 누볐다.
잔잔한 꽃무늬가 흩뿌려진 벽지를 찍고, 찍고, 또 찍고.
옥색의 침대 프레임을 건들고, 건들고, 또….
"정신 사나워. 쟤 좀 멈추게 할 수 없어요?"
"이모 마법사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
"부탁을 하나 할까 해."
이모가 새초롬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단조와 이저가 동그란 눈으로 이모가 하는 말을 받아적듯 경청했다. 미친듯이 날뛰던 럭키가 기에 눌린 것처럼 이모 곁으로 굴러갈 동안 이모의 설득은 이어졌다. 내내 이야기에 집중하던 단조가 고개부터 저었다.
“저 못해요.”
"아니, 왜 못해? 여기서 뒷산 가깝잖아. 가서 얘 좀 풀어달라구."
"누가 보면 어떡해."
"풀면 뉴스 나갈 것 같은데요."
이저가 단조를 거들었다.
"그럼 데리고 살려구?"
"그건 무리."
"맞아요."
"그러니까 답은 뭐다?"
"쟤가 어디서 온 애인 줄 알고 밖에다가 풀어줘요.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왜 안 돼.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게 더 말이 안 돼."
"그건 그래요."
이번엔 이모의 편을 든 이저였다.
"이모가 하면 되겠네. 쟤 이모 말은 잘 듣는 것 같은데, 이모가 풀어줘요!"
"나는 여기서 못 나가."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찌그러진 양푼처럼 단조는 표정을 구겼다.
"98년의 내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이거 서술형이에요?"
이저가 질문했다. 다행히 손은 들지 않았다.
"난 감당 못해~"
풀썩. 자수가 놓인 이불 위로 이모가 드러누웠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어떻게 확신해요?"
"응?"
확신하냐니. 많은 의미가 깃든 질문이었다. 천장 벽지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모는 대답했다. '응, 아무튼 난 알아.'
"둘이 말은 통해? 쟤 본심을 이모가 어떻게 아냐고요."
시비를 거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계속 심각하게 구니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연신 큭큭거리던 이모가 꿈꾸듯 중얼댔다.
"넌 꼭 말을 해야만 아니?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게 진심이야."
이모는 좋겠다. 말 안 해도 주변에서 알아줬구나. 단조의 진심은 이랬다.
"사람들이 내 진심은 모르던데요."
"풀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잠자코 둘을 지켜보던 이저가 물었다. 단조가 진짜 그럴 셈이냐는 얼굴로 이저를 돌아봤다.
"살면서 이런 일 한번 정도는 겪어보고 싶었어요."
동지가 아니라 적군이 따로 없네.
"역시~ 그 얼굴이면 나랑 말이 통해야지!"
"감사합니다."
꾸벅. 가볍게 목례를 하는 이저도 보통은 아니었다.
줄곧 누워있던 이모가 굼뜨게 몸을 일으켰다. 내일도 오늘처럼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모의 진심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시공간이 겹쳤다고 해도.
이모는 유리 밀폐 용기와 럭키를 번갈아 봤다. 그 시선 안에 다정함이 담겼다.
"혼자 잘 갈 수 있지? 약속 까먹은 거 미안해."
럭키가 오팔처럼 빛났다.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늙으면 자주 깜빡깜빡한다고들 그러더라.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전 지금도 깜빡깜빡해요."
이 사람은 귓속말이 취미인가? 깜짝 놀란 단조가 이저를 따라서 속삭였다. '정신 바짝 들게 해줘요?'
"고마워. 이건 두 사람한테도 하는 말이야."
옥색 몰딩이 둘러진 네모난 방. 서로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세 사람. 동글동글 몸을 굴리는 럭키. 과연 지구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근데……."
이모가 의미심장하게 뜸을 들였다. 마주한 이래 가장 진지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땅값 어디가 제일 많이 올라? 나 알려주면 안 돼?"
…그럼 그렇지.
"강아지 키우셨나 봐요."
혼잣말 같은 물음이 새벽 하늘에 띄워졌다. 단조의 시선을 따라가보면 유리 밀폐 용기에 담긴 럭키가 있었다. 럭키는 잠을 자는 건지, 명상을 하는 건지 해석할 수 없는 침묵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저는 잠에서 깨어나는 하늘을 보는 중이었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들었다. 느리게 끔뻑대는 와중, 마침 거리를 밝히던 가로등의 불빛도 소등됐다. 아침의 시작이었다.
"졸려서 못 알아들었어요. 죄송해요."
"강아지 키우셨나 봐요."
'럭키 이리 와~ 럭키!'
불과 몇 시간 전의 소동이 이저에게 밀려들었다.
"아.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럭키였거든요. 아파트 이름이 럭키 아파트여서."
바람 빠진 소리로 이저가 자꾸 피식댔다.
"트리마제에 살았다면 걔는 트리마제가 됐겠죠?"
"좋다."
"좋죠."
"그래도 럭키가 더 귀여워요."
"동의합니다."
귀여운 건 못 이겨요. 껄껄. 두 사람이 실실 쪼개는 빈도가 높아진 이유는 아무래도 밤을 샜기 때문일 것이다. 둘만의 비밀이 생겨서는 아닐 것이다.
"귀찮은 일에 안 엮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조금 곤란하게 됐는데 그건 단조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기억력 좋네요. 이름까지 외우시고."
"제 이름은 기억하세요?"
예상에 없던 기습 질문이 들어왔다.
"힌트 없나요."
"한 개 드릴게요."
"정 없다, 한 개는."
"알았어요. 두 개."
줘보라는 듯 단조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기억 못하는 사람한테 사람들은 흔히 뭐했냐고 묻죠?"
"힌트 맞아요? 정답. 술 마셨냐?"
"땡."
"아, 다른 힌트 줘요."
"친구가 전 애인한테 또 연락했대요. 그럼 단조 씨는 뭐라고 할 거예요?"
"정답. 사이코."
"안녕하세요, 사이코입니다. 그럼 안녕히,"
"어디 가요! 앉아봐요, 맞혀볼게요."
단조는 떠나려는 이저를 붙잡았다. 가만 보니 토라진 척 연기하는 솜씨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우선 럭키 일은 비밀이에요. 우리끼리만 알자고요."
단조의 신신당부에 이저는 입에 지퍼를 닫는 시늉으로 답했다.
"잊지 말아요. 알겠죠?"
바닥에 놓인 럭키가 단조의 손아귀에 잡혔다. 유리 밀폐 용기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던 단조가 이저를 돌아봤다.
"조심히 가세요, 이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