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와 이저
[d]azzling stranger
[u]nforgettable moments
[e]------------ ------
[t]--- --- ---
unforgettable moments
(4)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이번에는 예외였다. 눈을 찌르는 햇빛이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정오. 갓 잠에서 깬 이저는 푹 데친 시금치처럼 기운이 없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개운하게 기상했나요? 자문자답을 입에 굴리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몸을 움직이면 따라 일어나는 침구의 먼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일들이 죄다 허상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이저가 책상 의자에 앉기까지 되뇌는 말이 있었다.
"하기 싫다."
하고는 싶은데 하기가 싫어. 랩탑 모니터 불빛이 이저의 얼굴을 비추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왜 싫어? 한때는 이저도 공감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정말 좋아하는 일에는 자신이 만든 괴로움이 수반된다는 것을.
하루 일과는 비즈니스 메일함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모니터링을 위해 오디오북 채널의 리뷰를 확인하고, SNS 연관 태그에도 들어가 흔적을 남긴다. 그다음에는 녹음 일정을 재정비한다. 물론 마감이 임박했다면 이 단계는 건너뛰어야 한다.
도시에 위치한 녹음실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주로 홈레코딩을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쉬어 가는 게 가능해 보였다. 물론 훗날 하루 더 고생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저를 둘러싸던 타자 소리는 커피 내리는 소리로 변했다. 쪼르르륵. 뜨거운 물과 만나 부풀어 오르는 원두를 바라보며 이저는 지난밤의 불빛을 연상했다. 날이 밝았으니 단조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본인 때문에 넘어진 화분을 못 치우고 온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막막한 청소를 돕는 일손으로 합류하는 게 여러 모로 편할 것 같아서였다.
이웃이라서 도와주려는 거지? 마음에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글쎄였다. 이웃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 왜? 이 마을의 유일한 청년들이라? 대답은 같았다.
"글쎄."
나이만큼 유대감을 형성하기 쉬운 것도 없지. 그렇지만 또래를 만난 반가움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만큼 괴로운 건 없다. 그러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휴식이 된다. 이저는 쉬고 싶었다. 핑계여도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금방 내린 신선한 커피향이 이저의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메일 알림이었다.
[이저 님의 오랜 팬입니다]
이저는 글자를 응시하며 호로록,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엄지만 몇 번 움직여 화면을 무신경하게 긁었다. 그리고는 단호히 차단 목록에 집어넣었다.
뜨끈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이상하게 한기가 돌았다. 그는 평소보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다.
"다 챙겼나."
나갈 채비를 마친 이저가 한 번 더 쇼핑백 안을 확인했다. 지네약 두 개와 화분 마사토 주머니가 담긴 쇼핑백은 그의 손에 이끌려 단조에게 향하고 있었다.
동네길을 걷는 동안 이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저는 단조의 이모가 저에게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쟤 비위 맞추는 거 쉽지 않을 텐데. 어때요? 괜찮아?'
단조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고 말하려다가 그게 오히려 호기심을 부를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전 까다로움 전문이라서요. 괜찮아요.'
'그래요? 두 사람 코드가 되게 잘 맞나 봐.'
‘이저 너는 나랑 코드가 맞아. 별수 없네 받아들여.’
얼빠진 저를 두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나민의 뒷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바야흐로 이저가 고3이었을 때의 일이다. 이저는 늘 예측할 수 있는 길만 걸었다. 나민은 정석을 따르다가도 늘 딴 길로 샜다. 상극인 둘더러 주변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톰과 제리보다 더한 앙숙이라고. 물론 그 수식어처럼 앙증맞은 조합이었다면야 오히려 좋았겠지만, 실제로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때론 살벌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땐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둘은 언제 다퉜냐는 듯 붙어있고는 했다. 그래선지 남들은 그들더러 사이가 좋네, 했다.
나민과 만나면 기분 좋게 헤어진 경우가 드문데도 이저는 자꾸만 밤잠을 설쳤다. 가끔은 이름만 불려도 몸 안이 찌르르한 게 영 이상하다 싶었다. 보통의 감정은 아니라고 깨달았을 때, 이저에게 두려움이 급습했다. 내가 하도 사랑을 퍼주고 다녀서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민을 만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걱정은 까마득해졌고 될 대로 되라며 배짱만 두둑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둘은 여전히 친구 사이였다.
같은 대학에 입학한 둘은 종종 서로가 아닌 상대와 연애를 했다. 둘은 어느 연인보다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애인은 아니었다. 이저는 가늘고 길게 연애했다. 나민은 짧고 굵게 교제했다. 뭐든지 쉽게 질려 하는 나민의 성격상 연애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이저로 충분했다.
무슨 무슨 데이라고 편의점 앞이 어수선했다. 달달한 것들은 죄다 1+1이어서 하나만 사고 싶었던 이저에게는 영 별로인 행사였다. 하나를 골랐더니 둘이 됐다. 하나를 해치웠더니 하나가 남았다. 처치 곤란한 하나를 별생각 없이 나민에게 건넨 것이 화근이었다. 유독 동선이 겹쳐 이동하는 곳마다 서로를 마주쳤던 그 날. 평소에도 맛있는 간식이 있으면 자주 나눠 먹었던 사이라 그날도 이저는 나민에게 하나를 건넸다. 평소와 다른 건 유달리 지쳐 보이는 나민의 얼굴뿐이었다.
둘 곁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어딜 가나 이목이 집중되고 관심이 들끓는 건 당연지사였다. 도대체 무슨 사이냐? 다들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눈치였다. 무성한 소문 안에서 주어는 여러 번 교체됐고, 허상이 실제인 양 구설로 전염됐다. 나민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무시했고 이저는 눈치도 못 챘다.
이저는 본인 곁에 머물렀다가 이제는 멀어져 버린 숱한 사이를 떠올렸다. 곁에 남은 사람은 나랑 잘 맞아서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민이만 봐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둘이 함께일 수 있었던 건 오히려 서로가 너무 달라서였다. 안 맞는 걸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는 천성 때문이었다.
4학년을 앞두고 이저는 고백을 받았다. 나민이 아닌 타 과 학생에게. 그 학생은 학교 홍보대사였고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지면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어떤 소문이든 속보가 됐다.
나민은 타인을 통해 듣게 된 이저의 소식에 대뜸 마음이 내려앉았다. 이저는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였다. 그는 홍보대사들과 함께 교외 행사에 참여하곤 했다. 취업 준비로 바쁠 시기라 이저가 맡던 일은 자연스레 후배들의 몫이 됐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저가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나민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업 내내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민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이저를 찾아갔다. 이저는 나민의 전화를 받고 도서관을 걸어나갔다.
‘연애해?’
‘밥은?’
높낮이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맞붙었다.
'웬 연애?'
'야.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나민이 이저더러 ‘야’라 부르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화가 많이 났을 때, 미워 죽겠을 때. 열에 아홉은 기분이 뭣 같아서 ‘야’라 부른 적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이저는 나민이 화난 거라고 짐작했다.
'근데 왜 화가 났어? 굶었어?'
'연애하냐고, 너.'
누가 봐도 공부하다가 불려나온 차림의 이저에게 나민은 틈도 주지 않고 퍼부었다. 이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고백 때문에 그런가? 아니라고 대답할 찰나를 나민이 치고 들어왔다.
‘사랑해 걔를?’
‘사랑은 잘 모르겠는데.’
‘….’
‘음… 마음에는 들어.’
마음에 든다는 거였지 사랑한단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민은 내심 서운했다. 이걸로 대판 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마터면 더한 말도 쏟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제동이 걸렸다. 그래도 시비 걸지 않고 군말 않았다. 여기서 더 화를 내면 본인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였다.
며칠 뒤, 예고 없는 휴강 소식에 강의실은 어수선한 기운으로 가득찼다. 평소 같았으면 빠르게 비워져야 할 강의실에 드문드문 학생들이 남았다. 그런데 헝클어진 기류를 뚫고 누군가 등장했다. 이저에게 고백한 타 과 학생이었다. 뒷문에 어울려 앉아있던 무리가 그를 보고 아는 체했다.
'이저 만나러 왔어?'
그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저와 나민에게로 가까워졌다.
‘연락 안 되니까 답답해서 못 기다리겠더라고. 생각은 해 봤어? 오래 안 걸릴 거라며.’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학생들이 티가 나게 힐끗댔다.
‘여기서 말해도 괜찮겠어?’
이저는 상대가 상처받을까 염려됐다. 그리고 또 다른 가십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마음을 거절당하면 얼마나 속상한가. 그래서 이저는 타고난 성격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다정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두 사람이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나민은 초조해졌다. 정작 다정함에 속은 건 나인가? 과거도 되짚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엇박이 걸렸다. 도대체 언제부터지? 애초에 마음이 없으면 저딴 배려 따위 해줄 리 없잖아.
잠시 뒤 강의실로 돌아온 이저는 달라진 게 없었다.
‘가자. 점심 뭐 먹을래?’
'배 안 고파.'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애가 어떻게 그래? 학교 뒤집힐 일이네.’
나민은 대꾸 없이 물건을 챙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너한테 관심 많은 거 너만 모르지?'
어디를 가든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노골적인 호기심을 모를 리가 있나. 다만 이저는 신기할 뿐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질투는 처음이었으므로.
'네 얼굴 보면 뭐, 돈이라도 생긴대? 봐, 뭐라도 건지려는 저 표정.'
'그럼 나민이는 이미 재벌이겠다. 나 많이 봤으니까.'
'난 존나 가난해.'
'왜.'
답도 없는 구렁텅이에 던져져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을 네가 아냐고.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 이렇게 추해지는 줄 알았다면 최소한의 각오라도 하는 거였는데. 나민은 꺼내지 못한 말이 많았다.
'너는 나한테 뭘 건지고 싶은데.'
이저는 대답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정해진 답을 해석할 자신이 없어서 오랜 시간 미제로 남겨둔 문제였다.
'네 무의식.'
'….'
'네 무의식이 나였으면 좋겠어.'
나민의 염원대로 둘은 서로의 무의식까지도 점령하게 됐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들을 허물 수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연인이자 소울메이트였다. 그런데 닮은 구석보다는 다른 구석이 더 많았다. 같아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차이점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매번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게 쌓이다 보니 묻고 싶어도 묻지 못하는 이유가 생겼다. 관심이 아니라 눈치로 연명하는 관계는 사실상 종지부에 가까웠다.
그 날은 이별이 임박한 어느 오후였다.
‘이저 너에 대해서 다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제는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어. 너랑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네가 어떤 부분에서 상처받는지도 잘 모르겠고.’
‘…….’
‘오히려 친구였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지금은 너무 서운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
물론 이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민을 만나면 금방 없던 일이 됐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강변길을 걸었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면 세상은 저녁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다. 누구에게는 마무리이며 누구에게는 시작인 저녁을. 하늘이 노릇하게 익어 가면 금세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골든아워. 그 황금 같은 시간 속 이저와 나민은 이별과 마주했다. 서로에게 그을린 몇 년의 시간이 눈앞에 감겨들었다. 이저는 골든아워를 사랑했다. 정확히는 골든아워의 볕을, 그 볕을 맞는 나민을. 사랑하는 풍경들과 함께하는 이별은 마냥 서글프지 않았다. 책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나민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과거, 저를 향한 타 과 학생의 고백이 마음에 들었다고 표현한 이유는 자신감 넘치는 상대의 태도가 멋졌기 때문이라고. 너는 꽤 오래전부터 내 마음을 차지했는데, 헐거워진 마음을 단속하고 부정하느라 널 외면한 건 오히려 나였다고.
떠나는 버스를 보고 정류장에 앉았던 두 사람은 다음 버스가 오는 모습을 보고 두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이저가 챙긴 쇼핑백도 두 시간 내내 둘 사이를 지키고 있었다.
“말했었나. 지네는 쌍으로 다닌댔어요.”
“제발 끔찍한 소리 마세요….”
럭키 때문에 쌍으로 붙어 다니게 생긴 두 사람은 현재 열띤 추리 중이었다. 말이 좋아 추리였지 실은 잡담에 가까웠다. 처음 삼십 분은 럭키의 고향에 대한 추리를, 이어진 한 시간은 우주에 대한 잡담을.
"단조 씨가 럭키라면 어디로 갔을 것 같아요?"
"집."
단조의 대답은 말끔했다. 지나치게 생략된 부분이 많았기도 하고.
"저였으면 집에서 안 나갔어요. 그런데 얘는 아니어서 문제인 거죠."
머리를 싸매는 단조에게서 오전의 험난한 풍경이 그려졌다.
"눈 떠보니 없어진 게 말이 돼요? 전 이렇게 경우 없는 애는 처음 봐요."
가만히 고민해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겠지만, 무작정 들쑤시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때 저 멀리 승용차 한 대가 속도를 늦추며 점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