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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bricolage Feb 14. 2023

듀엣 5

단조와 이저

듀엣

duet



[d]azzling stranger

[u]nforgettable moments

[e]xtraordinary people

[t]--- --- ---



extraordinary people



https://youtu.be/mgFfiCjndxw



(5)

"이모는 잘 살아 있네요."


 도착했으면 답장해 달라는 단조의 메시지는 아직까지 1이 살아 있었다. 장시간 비행에 시차까지 감안해도 감감무소식이던 이모의 소식은 SNS로 알아낼 수 있었다. 단조는 이저에게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화면 속 여성은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가 정말 단조의 이모가 맞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지만 단조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단조는 게시글 아래의 코멘트를 소리내어 읽었다.


"'상쾌한 시작'이시라네요. 내 연락은 다 씹고 상쾌한 시작이라니."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내심 걱정하던 단조였다. 이저는 허무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빠져나가는 얼굴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제 시야로 침투했다. 간간이 차들은 지나갔지만 이렇게 멈추려는 기세로 다가오는 경우에는 열에 아홉 용건이 있어서였다. 핸드폰에 집중하던 단조도 낯선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멈춰선 은색 차량에서 음악이 둥둥 흘러나왔다.


 굳게 닫힌 차창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그러자 음악이 점점 더 선명한 기세로 단조와 이저에게 다가왔다. 차 안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레몬색으로 탈색한 여자가 할 말이 있는 듯 정류장 쪽을 바라봤다. 반면에 파란색 볼캡을 쓴 여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말씀 좀 물을게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은 파란색 볼캡이 좌우로 흔들렸다. 포기했다는 듯한 도리질이었다.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보였다.


 첫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예상이 가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대개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음식점의 영업 여부를 묻거나, 사람이 잘 몰리지 않는 근처 명소의 유무를 물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질문은 예상을 비껴갔다. 거의 동시에 비슷한 얼굴로 놀란 두 사람은 다시 반문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혹시 어젯밤에 무슨 소리 못 들으셨어요?"


 식은땀을 말려줄 여름 바람이 한 차례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레몬색 머리칼의 여자는 본인을 '윤'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파란색 볼캡을 가리키며 쟤는 낯가림이 심해서 비밀이 많아요, 했다.


 윤은 단조와 이저에게 본인의 핸드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빼곡한 글자가 담겨있었는데 언뜻 봐도 블로그 같았다.


[…몇 년 전부터 보살피는 시골집이 있다… 피추동이라는 마을에 있는데…무려 23년 8월 30일에……조카 말로는 무슨 굉음을 들었다는데… 한바탕 난리법석을…….]


"그냥 하는 말이겠죠. 막, 요즘도 그렇잖아요. 막, 인터넷에 예언글이라고 떠도는 글들 대부분이 헛소리잖아요."


 긴 글을 읽고 단조는 '피추동'과 '조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아 말이 빨라졌다. 게시글의 작성 날짜는 2002년이었으므로 얼추 예언글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예견하고 쓴 글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추후에 수정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수상한 글쓴이가 이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맞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도 고인으로 만들잖아요."


 이저는 몇 시간 전 읽은 메일을 떠올렸다. [이저 님의 오랜 팬입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의 내용은 팬레터로 위장한 악플러의 비난 메일이었다. 이저는 오디오북을 만들면서 그동안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가끔 화보도 찍었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관심을 얻었지만 나쁜 관심도 함께 얻었다. 메일, 댓글, DM, 톡. 비난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전 그런 거 피드에 뜨면 무조건 신고 때리거든요. 그래도 맨날 올라오는 것 같던데?"

"바퀴벌레 같애."


 윤의 말에 파란색 볼캡이 간결한 한마디를 던졌다.


'바퀴가 집 사면 <바퀴 달린 집> 아냐?'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단조는 이모를 떠올렸다.


"저번 주에 저희 둘이 넷플에서 곧 내려가는 영화를 봤어요. 여행 중이니까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었는데 쟤가 하도 졸랐거든요."

"맨날 아무것도 안 보고 구독료나 내는 주제에."

"그러니까 고맙다고. 암튼 주인공들이 우주로 가서 뭐를 터트리네 마네…. 뭐랄까, 인간이 인류를 구하는 내용이었거든요? 졸면서 봐서 그런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검색을 했죠. 그러다가 이렇게 짠!"


 윤은 대화의 귀재 같았다.


"영화가 98년 개봉작이라 검색 결과로 뜬 것 같아요."


 정류장 주변을 조용하게 구경하던 파란색 볼캡이 돌아와 말했다. 단조는 그들에게, 단지 그 글 하나만 읽고 직접 찾아온 거냐고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묵고 있기도 했고, 일단 날짜까지 정확하게 적혀있으니까 궁금하잖아요.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라 그런가?"

"너 이제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그런 거잖아."

"맞아. 여러 분, 제가 저번 달에 퇴사를 했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탈색도 해 봤어요. 윤이 설렘을 누르며 이야기했다. 그가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두 분은 여기 주민이신 거예요?"


 파란색 볼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저는 그렇다며 대답했고, 단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본인을 이 마을의 주민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었을 텐데 단조는 괜히 생각이 많아져서 대답을 신중하게 하고 싶었다.


"이번에 여기로 이사 오면서 타투 작업실을 열었어요."


 그러자 여행객 둘이 들떠서 난리가 났다.


"윤. 너 퇴사하면 타투하고 싶었다매."

"내 말이. 아이디가 뭐예요? 구경할래요. 엄청 작은 타투도 작업하시나요?"

"그럼요. 근데 아직 정식 오픈은 안 했고…,"


 아직 치우지 못한 집안 풍경이 생각났다. 맞다, 럭키. 일단 얘도 찾아야 했다.


"일정을 살짝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상관없어요. 놀면서 기다리면 돼요."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저는 등뒤에서 들리는 기척에 동네길을 돌아봤다. 동네 어르신이 느적느적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르신은 마을 언저리에서 아로니아 농장을 운영했다. 상품 가치는 떨어져도 맛은 그대로인 아로니아를 이저에게 나눠줬던 적도 있었다.


 이저를 따라 하나, 둘, 셋, 시선이 같은 곳으로 집중됐다. 안녕하세요, 가볍고 어색한 인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넷 중 유일하게 구면이었던 이저가 알아서 나섰다.


"병원 가세요?"

"해 뜨자마자 갔다오려고 했는데 놓쳤어."

"아이고. 버스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오셨어요."

"왜긴 왜야. 집에만 있음 심심하니까."

"아."

"답답해서 일찍 나와봤어. 저녁이나 먹고 돌아오려고. 다들 예쁘네~"


 어르신은 넷의 조합을 호기심 있는 눈으로 지켜봤다.


 젊음이 곱다는 말은 때론 서글프게 들렸다. 때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때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하지만 슬퍼하고, 헤매고, 낭비하겠지. 그게 젊음의 또 다른 이름일 테니까.


"어르신도 고우세요. 근데요, 혹시 어제 무슨 소리, 으읍!"

"어르신 어디 가세요? 여기서 멀어요?"


 파란색 볼캡이 화제를 돌리며 윤의 입을 다급하게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뭄모 몸모 몸 모뭄무! (무슨 소리 안 났나요!) 윤이 허우적댔다.


"가는 길에 태워다드려요?"


 근거 없는 글을 믿는 윤이 부끄러웠던 파란색 볼캡은 자리를 뜨기 위해 서둘렀다. 아무리 여행이라지만 다짜고짜 마을에 온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한 번으로 족했다. 날 창피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나의 친구 윤. 윤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장소를 옮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음에 타투하러 올게요. 꼭 봐요!"


 바람이 차창으로 들어가 레몬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조수석에서 자그맣게 손을 흔드는 파란색 볼캡이 보였다. 단조와 이저는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사이좋게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삶을 싣고 승용차는 동네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 소파 익숙한데?"


 러그에 박힌 흙을 털고 돌아온 이저가 자그마한 소파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아, 그거… 아마 정류장에서 보셨을 거예요. 가구 정리하면서 좀 낡은 거는 거기다 갖다 놨거든요. 정류장 의자도 난리 났길래."


 제주도 여행을 떠나던 날에 봤던 소파가 단조의 집에 있었다. 밤과 새벽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낮에 보니 익숙한 소파였던 것이다.


"버린 거 절대 아니에요."

"그 소파도 알 거예요. 자기가 버려진 게 아니라는 거."

"밤마다 우는 건 아니겠죠?"

"누가요. 소파가요?"


 네, 대답한 단조가 청소기를 작동시켰다. 손으로는 훑기 힘든 먼지들이 모조리 청소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집에 오고 싶어서 울면 어떡해요?"


 단조의 목소리가 청소기 소리 때문에 조금 더 커졌다.


"단조 씨 대신에 제가 가서 같이 울어줄게요."


 걱정 말라는 듯 이야기하는 이저의 낯빛이 영 별로였다. 단조는 청소기를 잠시 멈췄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빛이 너무…."

"좀비 같나. 감기 기운 있나 봐요. 조금 으슬으슬한데."

"약 먹었어요? 청소는 저 혼자서 해도 되는데. 집에 계시지."

"고작 감기인데요, 뭘."


 비교적 기운이 남아도는 단조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이내 감기약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뭐든지 날 아프게 하는 건 '고작'일 수 없어요."


 고작 그 한마디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제주도 여행은 어땠어요? 저 이거 정리할 동안 여행 후기나 들려줘요."


 단조가 거실 선반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재배치하는 뒷모습을 이저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 동네가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서 특별하거든요. 근데 가끔은 고립되는 기분이 들어서 벗어나고 싶어져요."

"…."

"겨울엔 눈도 많이 오거든요. 폭설이 내리면 고립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느껴져요. 근데 겨울에 떠나려면 짐도 많고 버겁잖아요. 겨울 내내 일단 견디고,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여름이 와요."

"떠날 때가 온 거네요?"


 한쪽 구석에 뒤집혀 있던 문진을 닦으며 단조가 물었다.


"처음에는 한 달 있다가 돌아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행 중간에 장마가 와서 겸사겸사 두 달이 됐죠."

"아, 장마. 혹시 떠났다가 안 돌아오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그의 물음에 이저는 잠시 대답을 골랐다.


"있었죠. 근데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게 더 어려웠어요. 낯선 곳은 여행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죠. 무엇보다 먹고살아야 되니까 돌아와야 했어요."

"그래서 제 꿈이 돈 많고 시간 많은 인간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일단 인간부터 되어야 할 텐데. 말을 마치자 뒤에서 이저의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재충전은 된 것 같아요? 올해 겨울도 견뎌야 하잖아요."


 쓰러진 책을 바로잡아 세우던 단조가 말했다.


"음…."

"'음?' 제대로 못 쉬었나 본데?"

"혹시 럭키가 여기에 숨은 건 아니겠죠?"


 끝내 대답을 마치지 못한 이저가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보며 안을 살폈다. 지금 럭키한테 쓰레기라고 하신 거예요? 단조의 장난에 이저가 다급히 설명했다. 어둡고 깜깜해서 오히려 익숙할지도 모르잖아요, 걔는 우주 곳곳을 다녔을 테니까.


 그런데 럭키는 정말 어디에 있는 걸까요.




[2002년 12월 31일 화요일.


허무하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일 뿐인데 나는 내일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

예외는 없다. 나만 늙진 않으니.

그래서 위로가 되냐고?

위로가 됐다면 나는 지금쯤 거리로 나가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우선 블로그 첫 글이라니….

그래. 나만의 블로그를 만든다면 나는 꼭 '그 약속'에 대해 쓰고 싶었다.


몇 년 전부터 보살피는 시골집이 있다.

피추동이라는 마을에 있는데 여기서 자그마치 왕복 5시간이 걸린다.

몸은 수고롭지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작지만 텃밭도 가꾸고, 반찬도 해 먹는다. (사실 외식하기가 마땅치 않다)

별거 아닌 일이 거기서는 행복이다.


1998년은 암흑기였다.

나를 비롯해서 대다수의 사람이 인고의 터널을 걸었지만,

원래 불행은 본인 몫이 가장 커 보이는 법이랬다.


그 무렵 시골에서 친해진 친구가 있다.

나이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받지도 주지도 않는 우정에 감동했다.


다행인 건 우리 우정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거다.

그 녀석이 나를 만나러 온다. 무려 23년 8월 30일에.

조카 말로는 무슨 굉음을 들었다는데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었나 보더라.


지구가 멸망을 하네 마네 말들 많았지만 몇 해가 지나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결국 나는 2023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덧없는 시간의 연속이겠지.

난 어린왕자 속 여우가 아니라서 즐겁게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으니까.

빛나는 순간은 분명 예고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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