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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Space Jun 04. 2022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되풀이되는 역사의 비애

요즘 길을 지나다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그 어떤 한 아이의 모습에서 그 또래의 모든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떠올린 그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그 후대의 미래를 생각한다. 즉 내가 죽어 나는 없지만 여전히 살아 땅을 고 살아갈, 그 예비 어른들을 그 순간에 나는 바라본다. 예비 어른을 바라보자, 사유의 폭풍이 다가온다. 빠르게 다가온 나머지 피하지 못해 휩쓸리고 만다.

그 아이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한다. 분명 평화로울 것이고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하나같이 밥을 먹고 숨을 쉬어 그들의 삶을 이룩할 것이다. 이 좁은 세상에서 그들은 운명이라 할 만한 짝을 찾아 생전 처음 보는 숨덩어리를 잉태할 테고, 그 숨덩어리는 형태를 갖추어 세상에 내던져질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죽음 뒤에는 삶이 있고 삶 이후에 죽음이 있다. 죽어서 땅에 묻힌 이는 새 생명의 양분이 되고 먹이가 될 수 있다. 또는 바람을 타거나 파도를 따라 부유한다. 마침내 그것은 흙이 되고 물의 성분이 되고 별이 되고 생명체가 된다.
그들은 또한 이름과 생각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는데, 사람은 분명 이름 남기지만, 가죽 역시 남긴다.
그리고 또, 쓰인 생각, 녹음된 생각, 녹화된 생각, 구전된 생각은 내게도 있고 어린아이에게도, 그 아이의 아이에게도 전달된다. 사유 흐름의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몸들은 이 땅 위에 하나같이 밥을 먹고 숨 쉬고 일하고 배우고 생각한다. 그들은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난다. 세상이 돌고 돈다. 변화가 있다. 변화에 따라 시간은 흐르는데, 그 흐름 위에 양 극단이란 없다. 단지 시야만 있을 뿐이다. 좁은 시야로 바라본 시간의 막대 위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 양 끝의 경계는 설정된다. 그 끝을 상정할 때 인간은 두려움, 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그 시간의 막대 위에 올라 있다. 시간 막대와 거리를 두어 볼 때면 시야가 넓어지는데, 멀찌감치 떨어져 시간의 막대를 바라볼 때 마음 한 편해진다.

모두가 하나의 시간 막대기 위에 있다. 그들은 모두 시간 막대 위에 존재한다. 그 막대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데, 후자의 해석을 나는 선호한다. 후자 해석이 내 마음을 편안케 한다. 이 깨달음은 경험담이다.

아, 사유의 폭풍이 지난 5초 남짓하는 이 시간에서 나는 태풍의 눈에 머무르며 잠시 평화로웠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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