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가 아닌 ‘감정’
그와의 연애가 끝난 이후, 나는 처음으로 연애의 잔해가 ‘에피소드’가 아닌 ‘감정’이 되는 경험을 했다. 물론 그 감정의 면면을 들춰보면 그 안을 빼곡히 채우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지만, 굳이 들춰보진 않는다.
그 면면의 에피소드 안에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갔을까, 싶은 망언과 강요, 혹은 무지성이 가득하다. ‘남자에게 사랑받아본 적 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게 페미니즘인데, 네가 이상한 사상에 젖어있으니 자신이 너를 가스라이팅해주겠다.’ 자주 말하던 그는, 단발머리도 싫고 조거팬츠도 싫으니 ‘여성스러운 외관’을 유지하길 은근히 강요했다. 못생긴 여자는 난자냉동을 시키라는 유튜버말에 킥킥거리기도 하고, ‘나중에 애를 낳아야 하는데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여자는 최악이다.’, ‘너는 허약해서 애 낳을 때 고생하겠다.’ 등 (내 몸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여성을 아기 낳는 ‘용도’ 쯤으로 취급하는 사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나만큼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영원히 없을 거라던 그는, 속삭였던 사랑의 언어만큼이나 언어폭력도 상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을 어떻게 참고 들었나 싶다가도, 화가 나기보단 내가 참 많이 사랑하긴 했나 보다, 정도의 감정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남긴 폭언만큼이나 ‘나도 그에게 상처를 줬겠거니.’하며, 구태여 사과받을 생각도, 사과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끔은, ‘우주의 양 끝단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서로를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나, 이게 인생인가.’ 싶은 어설픈 깨달음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사랑은 비이성의 영역이라는 말에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도 모두 동의한다. 그래서 결국의 지향점은 비이성과 이성의 모든 영역에서 궁극적으로 내가 편안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언어가 옳든, 옳지 않든, 이별이 필연적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이 에피소드들을 구태여 들춰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많이 사랑해서 어느 날은 기뻤고 어느 날은 슬펐다는 ‘감정’만을 기록했던 모양이다.
나에게 사랑이 감정의 영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감정이 고마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