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를 읽고
안나의 선택은 급작스러웠다. 적어도 내게는 안나라는 인물이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느껴졌다. 기차역에서 불안정한 안나의 심리가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으로 이끌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안나는 왜 그토록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빠지고야 만 것일까. 단순히 추앙받던 정숙한 귀부인이 불륜녀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아 가지 않는다. 물론 안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안나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라고 외쳤던 것처럼 나 자신도 안나가 왜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지가 궁금했다. 안나의 비극은 브론스키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자신이 지녔던 모든 사랑을 놓고 삶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기하게 됨으로써 생을 끝낸다. 그렇기에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안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글에서는 안나가 받은 사랑, 안나가 주었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 한 인물이 받게 되는 사랑은 앞으로 그 인물이 어떠한 삶을 살아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데 도움을 준다. 이에 안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이 과정은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의문이 들었던 부분과 연결되었다. ‘왜 안나 카레니나의 부모님 혹은 어린 시절 가정환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가’이다. 그녀의 가정환경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곤 그녀에게는 오빠인 오블론스키가 있다는 사실이 전부다. 사실 다른 소설이었다면 그리 어색한 부분도 아니었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소설 자체도 상당한 분량을 지닌 장편 소설인 데에다 안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점 인물들의 가정환경이 소개되어있기 때문이다. 쉐르바츠키가의 딸들을 비롯하여 레빈, 브론스키, 그리고 카레닌까지도 모두 그들의 부모님에 대한 소개가 짤막할지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나의 경우에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카레닌과 안나의 결혼을 주선한 분도 안나의 부모님이 아닌 안나의 아주머니 뻘 정도 되는 친척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가능한 시나리오는 안나의 부모님이 세상을 빨리 떠나신 것이다. 언급이 되어있지 않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안나의 부모님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이가 안 좋거나 계시지 않는 가능성일 테지만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다. 나이 차가 20살에 가깝지만 부유한 카레닌에게 안나가 시집을 간 것도 안나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안나가 카레닌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안나가 좋은 환경에서 지낼 뿐 아니라 오빠인 오블론스키까지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나의 심리적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모님의 부재로 인하여 사랑의 결핍을 겪었을 것이고 이는 안나로 하여금 사랑을 갈구하는 심리적 상태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사랑뿐만 아니라 남편인 카레닌으로부터 받은 사랑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카레닌 역시 고아로 자라며 사랑을 주고받는데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카레닌이 안나에게 정성을 쏟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안나가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까지 둘의 관계가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1부의 끝에서 안나가 남편에게서 위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다고 속으로 말하는 부분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 안나와 카레닌의 관계는 온전한 사랑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을 받는 입장으로서 안나는 온전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안나가 제대로 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불장난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지속적 사랑의 결핍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고 있던 안나는 끊임없이 사랑의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그 욕망을 채워줄 수 있었던 사람이 브론스키였을 뿐이다. 안나의 사랑은 심하게 허기진 상태에서 드디어 음식을 먹게 된 것과 같았다. 그때에는 즐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이 먹어 탈이 나기도 한다. 안나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브론스키를 만날 때마다 안나의 눈빛에 생기가 돌고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책을 읽는 독자인 내가 ‘안나는 과연 브론스키를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만큼 사랑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보였다.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결핍을 계속 브론스키로부터 채우려고 했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하지만 주기만 한다면 행복한 건 아닐 것이다. 브론스키가 안나를 사랑했다고 한들, 자신에게 계속 사랑을 요구하는 안나를 보면서 점점 지쳐갔을 것이다. 심한 사랑의 결핍에 시달렸던 상태에서 브론스키와의 사랑은 결국 안나가 삶의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아들과의 사랑에서도 안나의 사랑은 위태롭다. 어머니로서 세료자를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나가 아들을 찾는 건 자신이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지 못할 때뿐이다. 브론스키와 행복하게 지낼 때는 결코 세료자를 찾지 않는다. 관계가 위태롭거나 슬픔에 빠졌을 때 세료자를 찾는다. 자신을 사랑해 줄 또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사랑의 결핍을 느꼈던 안나.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은 안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안나가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을까. 브론스키의 쪽지를 받아 든 순간 안나가 기차로 뛰어든 선택이 이렇게 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한 인물의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따져보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따른다. 그러나 안나가 어떤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어떤 사랑을 하게 되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과정은 나에게 안나라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 끝나버린 인물에게 그 자신의 삶은 이미 끝난 삶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잃어가는, 결국 사랑의 결핍을 채우지 못했던 안나의 비참한 심정이 쓰라린 아픔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