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술, 밥, 포동포동(?)
막걸리 딱 한잔만
정신 차려보니 집이다. 어떻게 된 거지? 어슴프레 생각이 났다 안 났다 한다. 남편은 벌써 일어나 뭘 하는지 왔다 갔다 혼자 분주하다. “일어났어?” “응.” 그제야 생각이 난다. 아침 일찍 서둘러 밭에 나갔는데 농원에서 모종을 사, 한참 심고 있던 중에, 성당 오빠의 딱 한 잔 만 하고 하라는 소리에 남편이 냉큼 삽자루 집어던지고 앉아 술 마시려고 폼을 잡는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비호같이 몸을 날려 막걸리 한 잔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지난주에도 제대로 못 했고 지지난 주에도 제대로 일을 못해 우리만 지지부진한 데도, 남편은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라, 오늘은 내가 먼저 선수치고 막걸리를 마셨으니 운전 못 한다며 으름장을 놓고는, 당신은 운전해야 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한 잔 만 마시면 나중에 갈 때쯤 엔 술이 깨니까 그것만 마셔” 하며 나한테 타이르듯 말하고는, 남편은 싱긋 웃는다. 나는 냉큼 연거푸 석 잔을 마시고, 도저히 운전을 못하니 나는 모르겠노라 하고는 버팅겼다.
시간이 흘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많이 한 것 같고, 노래도 부른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났다가 안 났다가 한다. 남편도 같이 술을 마신 것 같기도 하고, 유치원 원장님과 코카콜라와 다 같이 술에 취했던 것 같다. 얼마나 마셨는지. 해가 져서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는 것을 본 것도 같다. “우리 어떻게 집에 왔어?” 내가 물으니, 남편은 “대리 불렀지.” 한다. 허허벌판에 대리기사가 어딘지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전화했더니 금방 오던데?” 남편은 대리 기사는 못 찾는 데가 없다며 웃는다. 이런 젠장! 또 내가 졌군.
남편은 술을 좋아한다. 시골 교사이셨던 시아버지께서도 술을 좋아해, 옛 시골 마을에 집집마다 담가둔 밀주 막걸리를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사이에 이 집에서 “선상님, 우리 집에 담가 놓은 막걸리가 잘 익었어요. 드시고 가이소.” 하면, 한잔 마시고, 또, 조금 가다가 저 집에서 “선상님요. 전구지 지짐에 약주 한잔 드시고 가이소.” 하면, 또 한잔. 날마다 집에 가기 전, 술이 거나해 콧노래 흥얼거리며 퇴근하셨는데. 급기야 급성 간경화로 발병한 지 두 주도 못 되어 4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항상 막내아들 술 많이 먹는 것을 걱정하셨다. 시골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다며 두고두고 눈물지으셨다. 제대로 해준 건 없는데, 공부는 잘해서 시골 없는 살림에 책 하나 변변히 못 사준 막내아들이 읍내에 양조장 집 아들과 함께 고성 중학교에서 딱 둘만 진주 고등학교에 합격한 일과, 서울대에 장학생으로 간 것을 기특해하시면서도 내심 미안해하셨다. “하이고, 군수님이 플랑카든가 뭔가를 걸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 그걸 몬했다.” 하시며 내내 말씀하셨다. “술만 쪼매만 마시면 흠잡을 데가 없는 안데.” 나도 술좀 적게 마시라고 잔소리를 항상 하지만, 남편은 쇠귀에 경읽기다.
술 때문에 일어난 사건 사고가 셀 수 없이 많다. 모든 부부싸움의 원인은 전부 술이다. 술이 깨고 나면 이제 조심하고, 술을 줄이겠다고 하지만, 그놈의 딱 한잔만 들어가면 술이 술을 부른다. 특히나, 옛이야기 나눌 벗이나,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마시는 술자리엔 영낙없이 과음이 되니, 말릴 재량이 없다. 술을 마실 땐 안주도 거의 안 먹고 술만 마신다. 배가 부르면 술맛이 없다는 게 그 이유이다. 빈속에 술을 마시니 금방 취한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취하고, 취해서 더 마시고 싶고. 술자리에서 한 얘기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필름이 끊어져 블랙아웃 상태가 되고, 당연히 실수를 하게 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똑같은 패턴으로 삼십에서 사십에는 일주일에 오일은 마신 것 같고. 50대에 들어서는 조금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술자리를 좋아한다.
날 좋은 어느 날,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나, 사고 쳤다.” 순간, 심장이 덜컥한다. “무슨 일인데?” 주변에서는 비명 소리와 함께, “아저씨 괜찮으세요?!”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119에 전화를 하고 조금 후에 망원동 어디쯤 있는 정형외과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병원 입구에는 앞바퀴가 사정없이 찌그러진 남편의 자전거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남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프랑켄슈타인처럼 온 얼굴을 스테이플러로 빵빵빵빵! 여기저기를 집어 놓고, 붕대로 칭칭 감아놓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시험기간 중 점심으로 동료 선생님들과 여의도에 있는 유명한 생태탕집이 있다는 소리에 자전거에 자신 있었던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갔더란다. 반주로 막걸리에 생태탕을 드시고, 성산 대교를 건너는데,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며, 멀쩡히 서 있는 가로등을 들이받은 것이다. “아이고, 음주 자전거가 얼마나 위험한 건데, 큰일 날 줄 안 지나 아세요.” 심하게 흉터가 남을 것 같아서 걱정을 하던 중, 남편 친구가 홍대 사거리에서 성형외과를 하고 있어서 거기로 가서 치료를 받고, 멀쩡히 나았다. 그 친구는, 쯧쯧 혀를 차며, 사람 얼굴에 어떻게 이렇게 많이 스테이플러를 박아놓을 수 있냐며 황당해했단다. 친구가 하도 치료비를 안 받겠다고 해서 치료비를 안 냈노라 하길래 내가 눈을 흘겨 줬더니, 포도 한 상자를 들고 가 줬노라 하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남편은 술을 끊지 못해, 술만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며 흉터자국이 선명히 나타났다. 내가 신호등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고만 마시라고 했지만, 한동안 신호등이 켜진 채로 막걸리 잔을 놓지 않았었다.
올해 환갑 되어, 술을 끊지는 못해도 많이 줄이며 건강에도 신경을 쓴다. 끼니도 꼬박꼬박 챙기고, 적었던 밥 양도 많이 늘어났다. 결혼 전, 첫인사를 하러 친정집에 왔을 때 친정엄마가 “나는 김만철이 들어온 줄 알고 깜짝 놀랐어.” 할 정도로 많이 말랐었다. (김만철 씨는 80년대 가족과 같이 탈북한 탈북민이다.) 지금은 얼굴이 윤기도 나고 살도 붙었다. 밥을 한 그릇 먹고, “조금 더 먹을까?”하면 나는 반색하며 말한다. “하이고 기특해라. 더 드세요. 술 말고 밥을 더더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