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13.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10)

제10화 : 첫사랑의 편지(10)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어느 때든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1980년 10월에 받은 편지니 44년쯤 되었네요. 오늘 편지는 사실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 배달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10) *


  잿빛 뿌연 하늘엔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아요. 뿌연 잿빛 속에 가려진 청아한 하늘이 그리워지는 날이에요.
  섧도록 아름다운 가을의 서정이 한층 깊어감에 따라 갈래머리 소녀의 마음 또한 깊어가는 가을을 느낀답니다.

  가을을 느끼게 하는 서정이 또 하나 나의 시선에 와 닿는답니다. 아름답지도 향기를 내뿜지도 아니하고 보잘것없이 핀 청초한 들국화는 정숙한 옛 여인의 맵시를 느끼게 합니다.

  선생님!
  너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게 되나 봐요. 안녕하시겠죠, 어머님이랑 동생분...
  저 역시 건강하답니다. 살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요. 그간 미용체조 조금 했거든요. 요즘 시내 나가면 예쁜 여자랑 남자가 어찌나 많은지 괜히 화가 나요.

  선생님!
  왠일이냐구요, 어제부터 가정실습을 했어요. 어제는 종일 배가 아파 방에서 뒹굴고 엄두는 냈지만 펜을 못 들었어요.

  이상하게도 가을엔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인 날 외로운 여인이 아름다워요."

  노래 가사죠. 쬐끔 마음에 드는 구절이에요.

  선생님!
  애들 실습 많이 나갔어요. 1/3 채 못 남았어요. 그 중 제가 끼이고요. 실습 나가고 싶은 마음 쬐끔은 있지만 나가려니 이상하게 망설여지고 가기 싫어요. 그래서 졸업까지 학교에 남아 있고 싶어요.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세요? 고단하지 않으세요? 애들은 속 안 썩이구요? 선생님께서 그 일에 만족을 느끼신다면 좋겠네요.
  선생님, 사람은 이상하죠. 곁에서 느끼는 행복은 모르나 봐요. 행복은 꼭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기에 자긴 불행하다고 생각하죠 행불행은 자기 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선생님께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면서 밝게 생활하세요.

  선생님!
  무척 보고 싶어요. 얘기도 하고 싶고, 놀려도 보고 싶고, 화내시게도 하구.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과 나란 존재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는 걸 알았어요.

  선생님!
  제가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자칭하면서 생활했는데, 가을이 오고 보니 아직도 어린 사춘기 소녀예요.
  괜히 우울하고 누구라도 좋아하구 싶구, 울고 싶고, 쓸쓸해지고, 터무니없는 공상이랑 머리에 가득하고 떨어지는 한 잎새를 보며 마치 내 가슴에 간직한 무엇이 떨어지는가 하는 착각을 하고, 먼곳으로 여행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고...
  아 문제예요, 가을병인가 봐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처방으로 약을 먹어야 할까 봐요.

선생님!
  선생님이란 단어가 참 마음에 안 들어요. 선생님 말고 다르게 부를 순 없을까요.
  음... 뭐라 부를까, 선생님은 뭐라 불리는 게 좋겠어요? 음... 생각나는 게 있다. 뭐냐구요, <비밀> 아직은 선생님이라 부를래요.
  난 아직 어쩔 수 없이 학생이니까요. 졸업할 때까지 연기해 두기로 하죠. 졸업하고 나선 <비밀> 부르겠어요.

  선생님, 책 한 권 읽었는데요. 그 속의 내용은 모든 이가 용맹스럽고 똑똑하고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한 장군이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하였답니다.
  근데 한 부하가 높은 벼슬을 탐내고 부인을 모함합니다. 장군은 부하의 꾐에 넘어가 아름답고 착한 부인을 자기 손으로 목졸라 죽여버립니다.

  선생님, 이 책을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의지가 약하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장군의 의지가 굳세었다면 아무리 부하가 부인을 모함해도 장군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군은 부하의 꾐에 빠지고 끝내는 자기도 죽고 마는 이야기에요.

  조그마한 사소한 일에 크나큰 비극을 낳게 되었답니다. 선생님께서도 항상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고 사람을 볼 때 한 면만을 보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한 면을 볼 줄 아세요. 남이 그 사람 욕을 한다고 선생님까지 욕하지 마시구요.

  선생님 우습죠, 제가 이런 소릴 하니까. 저도 그럴 거예요. 사람 보는 눈을 크게 가질래요.
  남이 욕을 해도 난 안 할래요. 선생님 의지를 굳게 가지시고 사나운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의지를 가지세요.

  선생님, 몸 조심하시고 날씨가 아침 저녁은 제법 쌀쌀해요.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밤에 이불 잘 덥고 자구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80, 10, 18일
  OO 올림


  <함께 나누기>


  편지 쓴 소녀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학교 다닐 때 1학년 학생이었는데 3학년 졸업반이니 부산으로 옮긴 지 2년 지난 일이군요.
  특별히 이 소녀가 기억에 남음은 그 학교 다닐 때는 별 알맹이 없는 안부 편지만 보내더니 떠나자마자 내용이 확 바뀌어서입니다.

  다른 소녀들보다 두 살 많아 2학년 때 이미 스무 살. 그걸 밑천(?) 삼아 '자기는 어린 여고생이 아니라 이미 졸업생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생님 좋아한다.'
  이런 식이라 어떤 답장도 하지 않고 너와 인연 끊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 나중에 들으니 울엄마가 전해준 말이 그애 가슴에 불 지른 듯.

  제 없을 때 찾아와 (학교 옮긴 뒤 한 번도 저랑 마주치지 않음)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울엄마가 무심코 이리 말했답니다.
  "아, 이 처자 참 참하네. 니가 우리 며느리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사복 입고 오니 성숙해 보여 설마 학생이라곤 생각 못해 내뱉은 말에 그 소녀는 정말로 곧이 들었나 봅니다.

  그 뒤로 제 없을 때만 찾아왔고, 편지 내용은 점점 도를 넘었고. 만나면 한 마디 따끔하게 말하려 했는데 그런 기회는 주지 않고. (당시엔 집전화가 없었음)
  울엄마를 원망했지만 이 편지 받은 석 달 뒤 저는 결혼하였고, 그 뒤로 연락이 완전 끊어졌습니다.

  "여고에 근무하는 총각교사는 자칫 오해를 사게 돼 문제 발생할지 모르니 늘 조심해라!"
  그 말을 선배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나중에 제가 후배교사에게 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편지를 쓴 소녀, 제발 좋은 짝 만나 행복한 가정 이루었기를.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긁적긁적(6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