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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16.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99)

제99편 : 문정영 시인의 '무가지'

@. 오늘은 문정영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무가지
                             문정영

  수없는 활자들이 매달린 감나무의 잎맥들은
  겨울로 들기 전에 읽어야 한다
  그때 가지들은 자신이 새긴 여름을 펼치고
  행간을 좁히거나 문맥을 정리하는 중이다
  무가지는 가지를 달고 있으나 가벼워서
  매단 느낌이 없다
  그 빈 가지들마저 읽고 나면 훨씬 내 어깨가 가벼워진다
  살아갈수록 무성해지는 가지들은 잘라야만
  빛을 뿌리까지 흡수할 수 있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감나무는 산감나무보다 먼저 잎을 떨군다
  간신히 홍시를 매달고 있는 *우듬지는
  새들의 눈에 먼저 읽힌다
  고욤나무에 감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는 날도
  공기가 가벼운 날을 택한다

  전철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무가지도 읽으면 가볍다
  - [잉크](2010년)

  *. 무가지(無價紙) : 길가에 무료로 배포되는 신문이나 잡지를 말하며, [무까지]로 읽음
  *. 우듬지 : 나무줄기에서 가장 꼭대기 부분을 가리키는 말

  #. 문정영 시인(1959년생) : 전남 장흥 출신으로 1997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광주일보]와 함께 운영하는 ‘동주문학상’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 [시산맥] 발행인




  <함께 나누기>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예전엔 버스 정류소 주변 길가에 꽂힌 [교차로]나 [벼룩시장] [울산소식]을 보면 한 부씩 가방에 넣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광고에 끌렸기 때문에. 부동산부터 헌 물건 교환 등. 지금은 ‘당근’으로 바뀌었지만.
  [교차로] [벼룩시장]처럼 돈을 주지 않고 공짜로 언제든 구입할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를 무가지(無價紙)라 합니다. 한자 뜻을 새기면 ‘값을(價) 매기지 않는(無) 잡지(紙)’가 되니 우리가 길가에서 무상으로 얻는 신문이나 잡지를 가리킵니다.

  다만 오늘 시에서는 무가지가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잎이 없는(無) 가지(枝)’란 뜻으로. 이렇게 하나의 낱말이 두 개의 뜻을 지니는 이런 표현법을 시에서는 중의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한 번 볼까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란 황진이의 시조를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여기서 벽계수(碧溪水)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을 지니지만, '벽계수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법을 중의법이라 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수없는 활자들이 매달린 감나무의 잎맥들은 / 겨울로 들기 전에 읽어야 한다”
  화자의 눈엔 감나무가 신문으로 보입니다. 지난봄과 여름의 비와 바람을 맞으며 형성된 수없는 잎맥. 또 화자의 눈에는 잎맥이 말 없는 활자로 보입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으라는 듯 숱한 사연을 담은.

  “그때 가지들은 자신이 새긴 여름을 펼치고 / 행간을 좁히거나 문맥을 정리하는 중이다”
  화자에게 감나무 잎맥과 가지는 길거리에서 보는 무가지와 같습니다. 핑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우리네 삶엔 할 말이 많지요. 잎이 없는 가지는 잎이 떨어질 때까지의 사연을 담았고, 길거리의 무가지(無價紙)는 나름 자기네 사연을 담았습니다.

  “살아갈수록 무성해지는 가지들은 잘라야만 / 빛을 뿌리까지 흡수할 수 있다”
  나무 가지치기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빛이 뿌리에까지 잘 전달함에 있습니다. 무성해지는 가지를 그냥 두면 뿌리 부분은 늘 그늘져 제대로 성장 못합니다. 우리네 사람도 그렇지요. 자기를 옭아매는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류를 끊는 게 낫습니다. 마치 햇빛이 뿌리까지 닿도록.

  “가로수로 심어놓은 감나무는 산감나무보다 먼저 잎을 떨군다 / 간신히 홍시를 매달고 있는 우듬지는 / 새들의 눈에 먼저 읽힌다”
  감나무가 잎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끝까지 홍시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언뜻 볼 때는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우리는 알고 있지요. 홍시가 땅에 떨어져야 거기에 있는 감씨가 다음 해 싹이 나고 나무가 되어 땅 위로 솟아남을.

  “전철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무가지도 읽으면 가볍다”
  일반 신문은 좋은 소식도 싣지만 굳긴 소식도 나쁜 소식도 싶습니다. 허나 무가지엔 나쁜 소식은 없고 미담만 실립니다. 무가지처럼 대가 없이 누구인가를 기쁘게 해 준다면 내 마음도 얼마나 가벼울까요. 심각함도 근심도 걱정도 담지 않은 무가지.

  그래서 무가지는 가벼워 읽기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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