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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26.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69)

제69화 : 남도 돌아보기(후기)

     * 남도 돌아보기(후기) *



  지지난 주 금요일(4월 12일) 남도 여행 중이란 공지 올렸습니다. 깔쌈한 여행기 기대하시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으나 대충 끄적인 글 하나 배달합니다.          

  국어 교과서에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글은 확인해 보진 않았으나 역사 교과서보다 더 많이 실려 있다고 생각한다. [난중일기] 한 부분이 실리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 전기문(傳記文)도 실리고, 시나 수필로 문학적인 글도 실렸으니까.     
  나는 학생일 때도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학년 바뀔 때마다 배웠고, 교사가 된 뒤로도 그분에 관한 글을 수십 번이나 가르쳤다. 어쩌면 역사 교사보다 역사적인 업적 소개가 아닌 감성 면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배울 때나 가르칠 때나 나를 가로막는 하나의 의문, 그분은 '李舜臣'인가, 아니면 '李舜神'인가 하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하 '臣'인가 아니면 신 '神'인가? 교과서를 아무리 뚫어지게 훑어봐도 인간 이순신은 없고 신격화된 '이순神'만 보이니까.


(진도 방향에서 본 울돌목 이순신 장군상 )



  어느 해 고등학교 1학년 수업에 마침 이순신 장군 관련 단원이 나와 한참 열심히 설명하고 난 뒤 질문을 받을 때였다. 한 명이 손을 들었다. 평소 싱거운 말 잘하는 애라 그냥 쓸데없는 잡담이겠거니 했는데 녀석이 던진 말은...     
  "선생님, 역사 시간에 들으니까 당대 양반들은 시간만 나면 기생들을 불러 파티 열었다 하는데, 이순신 장군님도 그런 파티에 참석했을까요?"
  아이들은 마구 책상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녀석이 또 엉뚱한 소리 해 분위기 깬다고 야단치려고 불러내었다.     

  헌데 녀석이 한 마디 더 던지는 게 아닌가.
  "아니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순신 장군님은 밤낮없이 나라와 겨레 걱정만 하고 사셨습니까. 가끔 엇길도 가야 사람 아닙니까?"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래, 왜 나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오해는 마시길 이순신 장군께서 기생과 어울려 술 마셨느냐 아니냐를 거론함이 아니니까. 녀석이 내게 준 충격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교과서를 읽으면 녀석의 말대로 오직 나라와 겨레만 생각하며 사신 걸로 돼 있다.


(해남 방향에 세워진 '명량의 고뇌하는 이순신상' - 해남신문에서 퍼옴)



  일어날지도 모를 적의 침략에 대비해 거북선을 만들고, 나라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다른 사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가정생활이 어땠는지(아 물론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란 한 줄이 들어 있긴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아내뿐 아니라 첩도 있었다는데 처첩 갈등은 없었는지, 그로 인한 부부싸움은 없었는지, 자식들은 애를 먹이지 않았는지 등등. 한 분 계신 어머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다른 흠집에 관한 기록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다 보면 특이한(?) 점 하나를 보게 된다.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아주 뛰어난 장군이 아닌가. 그렇다면 싸울 때마다 이겼거나, 졌더라도 그 횟수는 극소수이리라. 아니었다, 승전만큼 패전도 많았다.     
  패전이 많다는 건 장군으로선 치명적이다. 함에도 그걸 두고 장군으로서의 명성에 흠을 잡지 않는다. 또한 나폴레옹과 아내 조제핀은 원만한 부부가 아니었다. 조제핀은 바람을 피웠고, 나폴레옹도 여러 여자를 사귀었다. 그렇다고 형편없는 장군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청해진 유적지에서 내려다 본 바다)



  이번 남도 여행 중 '명량대첩해전사 기념관(전남 해남군)'에서 귀한(?) 한 줄을 읽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흠집. 장군은 머리가 썩 좋지 않았다는 구절. 장군은 과거시험 첫 번엔 실패하고 재수해 합격했는데, 성적은 29명 중 12등.     
  과거시험에 재수는 물론 삼수ㆍ사수 하고도 불합격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29명 중에 12등이면 쳐지는 성적도 아니다. 헌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장군의 위대함으로 보면 단번에 붙고 성적도 장원 아니면 아원(2등)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율곡 이이 선생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아홉 번의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란 별명을 얻었으니. 그러나 나는 장군의 이 점을 더 높이 산다. 즉 어릴 때부터 천재가 아니라 대기만성형이라는 점.     
  대기만성형은 첫째 교만하지 않다. 자신의 흑역사 시절을 잘 아니 뻐기고 다니지 않는다. 대기만성형은 더욱 발전할 일만 남았을 뿐 퇴보할 일은 없다. 이미 늦게 시작했기에 축적된 지식이 그를 더욱 발전시키기에.


(해남 명사십리 백사장을 거니는 두 사람의 그림자)



  장군의 흠집을 발견하면서 솔직히 기뻤다.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봤기에. 부족함을 알았기에 더욱더 열심히 했으리란 짐작도 가능하다. 울돌목대첩(명량대첩)을 이끌기 위한 계획수립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랫사람이 올려주는 정보로는 완벽히 정교한 작전을 세우지 못한다.     
  처음에는 부하들에게 물었으리라. 전라우수영(해남) 근처 바다에서 가장 물살의 흐름이 빠른 곳이 어딘가 하고. 울돌목이란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갔으리라. 그리고 눈으로 보았다. 웬만한 강보다 더 빠르게 흐르는 물살.     

  그때부터 장군의 머릿속엔 울돌목에 밀물과 썰물의 차이, 간조 때와 만조 때는 언제며, 가장 소용돌이가 크게 일어날 때는 언제인가 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직접 보고 확인한 뒤에 계획이 하나하나 정리되어 저장되었다. 이를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있었을까. 전문 뱃사람 못지않게 오랫동안 살폈으리라.
  인간 이순신이기에 이룬 대첩이었다. 만약 신이었다면, 특히 교만의 신이었다면 그런 결과를 낳지 못했으리라. 부족함을 아니 그 부족함을 메우려 남들보다 더 노력한 결과의 승리였다. 그 승리로 우리 민족은 자존심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이 울돌목 방문 두 번째다. 다시 한번 더 서게 된다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장흥 소등섬 일출 사진을 보고 그림)



  *. 울돌목은 한쪽은 진도군 다른 한쪽은 해남군에 접해 있습니다. 혹 거기를 방문하신다면 해남군에서만 말고 진도군에 가서도 보시길. 참 거기 가신다면 ‘진도대교국밥’에 들러 ‘돼지머리국밥’(8천 원) 한 번 드시길. 일반적인 국밥과 달리 맑은 국밥인데 아주 담백하여 입에 맞습디다.     
  그리고 숙소로 진도군 쪽 울돌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꿈의펜션’을 추천합니다. 에어비앤비로 하지 말고 직접 주인과 전화하여 예약하면 싸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일행 넷은 40평짜리를 18만 원에 계약했습니다. 이곳은 특히 전망도 시설도 아주 우수하여 대단히 만족스러웠습니다.

  **. 둘째 사진은 첫째 사진의 '이순신상'에 비해 작지만 이 동상이 더 유명합니다. (상표 등록된 유일한 이순신 동상으로 사진에선 뚜렷하지 않지만 손에 쥔 게 칼이 아닌 지도랍니다)


  다섯째 사진은 장흥군 소재 '소등섬'인데 여기는 일출이 유명한 곳이므로 해 돋기 전에 가보시기를... 미리 물때를 알고 맞추면 섬 안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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