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올해도 여전히 이쯤 돼서 엔실레이지를 담는군요. 학보사의 한 페이지가 기억돼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물론이구요. 이제 방학을 했는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 믿습니다.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영어 수학 할려고 하니 통 되질 않아요. 어젯밤엔 한 잠도 못 잤어요.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자야만 한 전데 참 별일이지요.
선생님, 통지표 "학교에서 란" 말이죠. 저희 (담임) 선생님이 글쎄 '우울증에 걸려 있음'이라고 적지 않았겠어요. 어찌나 약이 오르든지... 선생님, 방학을 물론 짜임새 있게 보내실 선생님이시지만 보다 더 알찬 생활이 되시길 빌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안녕히 계셔요.
<함께 나누기>
오늘 편지도 78~79년에 걸쳐 왔으니 대략 45년쯤 된 글이군요.
읽어보아 짐작하셨겠지만 이 학생은 제 반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그 반 담임선생님께서 어느날 제게 자기 반 한 애가 특이해 저더러 상담해 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이 편지 소녀입니다. 왜 제게 부탁했느냐고 하니까 당시 제가 근무하던 학교는 여상이라, 주산 부기에 몰두해야 하건만 그런 공부엔 관심 없고 시인지 낙서인지 글쓰기에만 관심 있어 한다...
문제는 상담 뒤에 더 커졌습니다. 제 실수였지요. "주산ㆍ부기 공부도 하면서 짬짬이 글도 쓰렴. 써오면 내가 봐 주겠다" 그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 오는 통에 정작 필요한 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그래서 제가 어느날 매정하게 말했지요. "전공과목 공부 안 하면 네 글도 읽지 않고 너도 만나지 않겠다." 그러자 아주 저를 원망하는 편지를 열 장 넘게 써 보냈는데 첫 번째는 거기에 대한 사죄의 편지 같습니다.
두 번째 편지는 소녀가 생기를 잃은 것 같다는 담임의 말에 다시 만나 얘기 나눴더니 또 글을 써 들고 왔고. 그때는 다만 만나 글 품평은 해주되 건성으로 했더니 또 무례하게 해서 야단쳤고. 그에 대한 답글로 보입니다
세 번째는 제가 학교를 부산으로 옮긴 뒤에 받은 편지입니다. 글 속에 나오는 '엔실레이지'는 겨울에 소 먹일 풀이 없으니 저장하는 일입니다. 즉 늦가을에 풀을 뜯어 큰 통 속에 넣어두면 마치 김치처럼 변하는데 이를 소에게 주면 영양과 맛 둘 다 충족시킨답니다. 통지표 종합생활란의 선생님이 '우울증에 걸려 있음'이라 적었다는 내용을 보고 웃었습니다. 소녀가 자기 또래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런 내용을 적은 듯.
한 번은 수업 중에 멍하니 밖을 보다가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녀. 학교를 떠난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편지 보내던 소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