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진 / mjin.shine@gmail.com
필자가 아직 걸음마를 띄고 있던 1989년은 미래에 대한 끝없는 상상이 문화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 같다. 2015년을 배경으로 미래를 그렸던 ‘백투더퓨쳐Ⅱ(1989)’는 테마공원과 같은 도심과 화상전화, 홀로그램 영상을 일상 속에 녹여냈고, 만화영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는 2020년을 본격적인 우주개발의 시작점으로 잡았다. 새로운 경관, 새로운 장소, 새로운 행성(!)에 대한 벅찬 꿈을 꾸던 시기였던 듯 하다.
30여 년이 지나 백투더퓨쳐의 주인공, 마티를 소스라치게 놀래켰던 홀로그램 영상과 원더키디의 배경이 된 환경 문제가 (시각적 형태는 조금 다를지언정) 현실화되고 있다. 미래가 성큼 다가온 듯 하다. 또 한편 과거에 대한 향수는 레트로의 형태로 우리 앞에 반복적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세계에서 떨어진 듯한 이상한 건물과 하늘의 저편을 향해 솟아오르던 건축의 시대를 지나 표면과 환경이 시대적 중심이 되는 오늘은 분명 과거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가 교차하는 곳이지 않을까? 즉, 오늘날의 현재는 무엇보다 변증법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우리가 과거 그렸던 미래와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각각 파편으로 변해 가끔은 분해되어, 또 어떨 때는 통합되어 그 모습을 비추고 있는 듯 하다.
조경 전문 학술지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18권 3호는 조경 비평을 주제로 잡고 짧고 긴 많은 글을 수집했다. 게스트 에디터였던 줄리아 처니악(Julia Czerniak)은 학문의 발전에서 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큰 틀, 행동의 방식, 그리고 변화의 기제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1] 결국 비평은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점치는 하나의 방법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2020년 오늘, 미래의 조경을 읽기 위한 방법으로 비평이라는 선택지를 택할 수 있다.
같은 호에 수록된 글 중, 조경 비평을 논하는 두 개의 글이 눈에 띄었다. 먼저, 디지털 전환의 시대라는 맥락 속에서 비평의 역할, 혹은 부재를 논하는 질리안 월리스(Jillian Wallis)의 글이다.[2] 조경의 주안점이 디자인, 프로세스, 경관의 재현, 미학, 사이트, 장소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해 디지털화를 비롯한 기술적 주제에 대한 조경 비평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 논의를 이룬다. 결국, 조경을 보다 넓은 범주의 이론적, 기술적 역사 안으로 삽입하고 디지털 문화, 기술, 디자인과 연관시키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는 점에서 조경 비평의 (부재중인) 역할이 문제가 된다.
물론 이 글은 필자의 약점을 겨냥하고 뼈를 때리는 글이다. 하지만 그를 넘어서, 비평가가 자신이 아는 범주를 넘어 미지의 내용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을 때, 노력 혹은 다른 방법을 통해 해당 문제를 마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평가가 ‘몰라서 누락하는’ 내용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지 못함, 즉 무지의 지평을 인정하는 것에 미래 조경 비평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하나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글은 생태적 인프라스트럭처로서 경관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니스 호프만 브랜트(Denise Hoffman Brandt)의 글이다. 그는 생태학의 발전 양상에 힌트가 숨어 있음을 설명하며, 무엇보다 흑백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이상적 세계가 허황된 상상임을 역설한다. 오히려 대부분 세계는 회색 지대이며, 비평가 혹은 실천가는 모두 끊임없는 논쟁과 질문을 통해 과정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의 속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필자가 흥미롭게 본 지점은 브랜트가 주장하는 조경가 혹은 조경 비평가가 지녀야 하는 ‘회복탄력적(resilient)’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조경 설계가 결코 기존의 필드 속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면, 조경 비평은 과거의 도구가 아닌 미래의 도구를 직접 만들어내야 함이 확연히 느껴진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위해 반영구적 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80, 90년대 대학원을 다녔던 (한참)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해보면,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던 도구가 많았다고 한다. (어떤 교수님은 유리공예를 통해 실험 도구를 만들고는 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범-분야적 창조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확실히, 조경 비평의 새로운 도구는 아마 기존의 것이 아닌, 우리가 스스로 구현해야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비평의 새로운 도구는 어떤 형태의, 어떤 방법의 것이 될지는 확실히 가늠되지 않는다. 월리스의 말과 같이 디지털 툴에 대한 고도의 이해가 조경 비평의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반면 브랜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생태계에 대한 발전된 연구를 파악하고 조경에 접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점에도 동의하는 바이다. 즉, 조경의 지평이 넓어지는 만큼이나 조경의 도구 역시 방대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결과에 치닫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조경의 이론과 실천을 면밀히 알 수 없기에 – 다른 말로,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 여전히 소통과 교류를 주장하기에 바쁜 듯 하다. 필자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현재 몸담고 있는 분야를 제대로 익히기도 바쁜 것도 사실이고, 익숙하지 않은 조경 분야에 굳이 발을 내딛을 필요를 체감하지 못하는 게으름도 여전하다. 그렇다면 비평의 새로운 도구보다도 비평의 가장 오랜 도구, 즉 비평가로서의 나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요원한 상황인 듯 싶다.
고대 그리스의 경구는 나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철학적 화두답게 해석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필자는 비평을 하는, 혹은 비평을 하고자 하는 입장을 지닌 자로서 내가 하는 비평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또 그를 위해 비평가로서 내 자신을 비평해보는 것이(팩폭으로 뼈를 때리는 것이겠지만서도) 중요하지 않을까. 나의 조경 지식과, 상식과, 조경에 대한 기대와 태도, 이해와 해석이 결국 내가 만들어내는 조경 비평의 큰 틀로 구축된다. 우리가 조경 비평의 유용성과 미래 나아갈 다양한 방향을 고려했을 때, 또 확장의 필요성을 곱씹었을 때 – 즉, 조경 작품을 감상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통해 조경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면, 감상자에 대한 (자기)비평이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멀리 보자면, 이는 곧 조경 비평의 주관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주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조경과 같은 응용 학문이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이 주관적 평가에 대한 문제인데, 사실 이는 조경 비평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비평은 하나의 옳은 결과를 말하는 행위가 아니기에 조경 비평 역시 비평가 개인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다만, 비평가의 배경과 지식, 사회적 역할과 비평글의 질적 수준에서 비평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개개인이 정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고민은 존재한다.
즉, 비평가의 자기 비평에 이어, 조경 작품에 대한 비평에 이어, 비평 감상자의 또 다른 비평이 요구된다. 비평의 순환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해당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요청하고, 조경의 맥락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우리 경관 만들기에 사회적 참여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크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참여가 아닌,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논의하는 토론장의 형성과 유지, 발전에 대한 참여가 될 수 있다. 만약 미래의 조경이 사회적 참여를 전제로 이루어진다면, 즉 공론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상황에서 계속해서 작동한다면, 조경 비평의 확장이 공론장 형성과 유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필자의 견해이자 기대이다.
[1] Jillian Walliss (2018) “Landscape architecture and the digital turn: Towards a productive critique,”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18(3): 12-15.
[2] Denise Hoffman Brandt (2018) “The body in the library, or a blood meridian,”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18(3):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