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도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LC Press Feb 23. 2021

[홍대, 2003년 겨울 #1] 홍대 또는 홍대 앞

박영석 / yareut@gmail.com



스무 살, 가진 게 없어 잃을 것이 없었고 주머니가 가벼워도 자신감으로 가슴이 가득 찼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와 친구들은 서울이라는 생경한 광야에서 천천히 그러나 시침처럼 확실히 움트고 있었다. 목요일 낮이면, 어김없이 두어 명은 홍익대 운동장에서 병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밴드 멤버 다섯 명 중 두 명이 다니고 있던 학교라 스스럼이 없었고, 이따금 그들이 속한 동아리 연습실에서 몰래 합주를 하던 터라 학교 풍경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축구와 농구 시합으로 늘 먼지가 나리는 운동장 스탠드에서, 아직 합류하지 않은 두어 명을 전화로 닦달하면서, 교문을 들고 나는 학생들을 관찰하곤 했다.  


거의 다 왔다는 익숙한 거짓말을 받아들일 즈음이면 우리는 하루를 탕진할 곳들을 읊조렸고, ‘지난번에 거기’ 부터 ‘새로 생긴 여기’, ‘물 좋다는 저기’를 늘어놓고는 생각나는 순서대로 문을 두드렸다.  홍대는 그래도 괜찮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현란한 강남, 연극을 봐야 할 것만 같은 대학로, 뜨내기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이태원, 소주도 파는지 확인해야 했던 압구정과는 달랐다. 밥과 술이 저렴해서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유흥가들 중에는 중고등학생들이 붐비는 신림과 신천, 끝없이 펼쳐진 술집 거리의 건대입구, 넥타이 맨 직장인들 틈바구니가 꺼려지던 종로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홍대 앞은 영동 시장 길을 따라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발달한 신사동보다 공간적인 리듬감이 있었고, 홍대와 비슷하게 젊은이가 붐비고 독특한 분위기의 술집들이 늘어섰지만 부족함이 느껴지던 신촌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을지로, 익선동, 합정동 등 최근 힙(hip)한 거리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거나 뜨는 거리로 다시 호명되는 곳들은, 그 거리가 가진 고유한 분위기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나름의 원동력이 있을 것이다. 17년 전, 서울에서 가장 뜨거웠던 홍대 앞을 돌아보면서 ‘홍대스러운 분위기’를 반추해보고 오늘날 뜨는 거리와 연결 가능한 지점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에 비친 자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