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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C Press Feb 25. 2021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향하여

존 어리, 『모빌리티』

박영석 / yareut@gmail.com


서명 모빌리티(Mobilities)

저자 존 어리(John Urry)

역자 강현수, 이희상

출판사 아카넷

출판일 2014년 6월 17일

ISBN 978-89-5733-329-7 94300



월요일 아침, 부산행 첫 기차 KTX000에 올랐다. 낙성대동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 티켓 예매 어플리케이션 ‘코레일톡’으로 여정과 행선지를 선택하고 결제를 완료했다. 지하철 4호선에서 서울역 승차 플랫폼에 오르기 까지 코레일 직원과의 대면 접촉 한번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시 스마트폰을 열어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부산역에서 회의 장소까지 거리와 대략의 택시비를 확인했다. 회의 전 간단히 요기를 할 만한 식당을 지도 안에서 둘러보았다. 운이 좋게도 평점 4.3, 블로그 포스팅 20건 이상의 밀면 가게가 회의 장소 73m 거리에 있었다. 회의를 마친 후 구시가지를 조금 걸어볼까 했지만,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안건이기에 얼른 부산에서 달아날 예정이다.


오늘의 모바일 생활권을 이룩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정보통신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공간의 압축을 초래해왔고, 개인의 차원에서 경험하는 공간의 지평은 물리적 경계로부터 훨씬 더 멀리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는 모빌리티에 관한 개념을 정립하고 다각적인 접근과 심층적인 서술을 통해, 현대 사회 깊숙이 침투한 움직임에 대한 성찰을 여러 저서에서 다루어 왔다. 특히 「모빌리티」에서는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정의하며, 포스트 사회의 국면에서 새로운 사회학을 주창한다. 나아가 인류의 문명사를 전환시킨 주요한 지점에는 모빌리티 시스템의 출현과 대중화가 있었고, 근대화 또는 현대 문명 체계의 내면화 단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훈육의 계제였다고 밝히고 있다.



모빌리티 전환


「모빌리티」는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모바일 세계’는 모빌리티의 의미와 특성을 설명하면서 ‘모빌리티 전환’(mobility turn)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동안 사회과학 분야에서 간과되어 온 모빌리티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 모빌리티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특히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13가지 특징과 거리의 문제를 교통, 어린이, 주전자 구매, 카리브해 지역, 구제역 등 5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제2부 ‘이동과 통신’은 역사적으로 발달해 온 다섯 가지 모빌리티 시스템의 역사적·공간적·사회적 특성을 상술하고 있다. 첫 번째 보도와 길에서는 프랑스 파리와 같은 19세기 근대 도시의 대규모 도시계획이 초래한 공간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걷기를 논의한다. 두 번째 대중 기차에서는 기차의 등장으로 인한 여행의 대중화와 기차 시간표에 기반 한 근대적 시간 체계를 설명한다. 세 번째 자동차와 도로에 거주하기에서는 자동차의 진화 과정에서 자동차가 점차 거주 장소로서 역할하고 있으며, 인간과 기계의 혼종 결합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날아다니기에서는 비행기 모빌리티 시스템을 다루면서 오늘날 도시와 공항 시스템이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연결하고 상상하기는 네트워크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다룬다. 특히 인터넷과 같은 전자 공간은 현존과 부재의 경계를 소멸시키며 기존 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제3부 ‘이동 중인 사회와 시스템’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인 ‘네트워크 자본’(network capital)으로 인한 모빌리티의 차이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더불어 모빌리티 패러다임 속에서도 만남과 장소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다소 암울한 미래의 시나리오들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향하여


이 책이 담고 있는 모빌리티의 핵심은 그가 13가지 특성으로 정리하고 있는 ‘모빌리티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개념을 이용하여 제시한 것이다. 특정 시기에 당대 과학자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 자체의 모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그 특정 패러다임만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빗대어 어리는 단순히 기존의 사회과학 담론 속에 모빌리티라는 새로운 학문적 범주를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고 읽어 내는 관점과 접근법으로서 모빌리티를 적용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였다. 그가 정리한 모빌리티 패러다임에 따르면, 먼 거리에서 빠르고 강렬하게 나타나는 물리적 이동과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가 다양하게 연결된다고 보았다. 특히 육체 이동, 사물의 이동, 상상 이동, 가상 이동, 통신 이동 등 상호 의존적인 모빌리티가 출현하면서 이동의 양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육체적 이동에 있어서도 다중적인 감각으로 경험하면서 시각적 속성이 변화한다고 보았고, 광범위한 이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지구적 대면 연결은 사물과 사람이 시공간을 통해 결합하는 방식을 발생시킨다고 쓰고 있다. 권력과 감시의 측면에서는 이동하고 있는 인구에 대한 통치성을 재고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이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행동 유도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pp. 103-110).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사람, 사물, 정보의] 순환이 발생하면서 모빌리티 자본을 수반하는 다양한 형태의 이동경로가 양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모빌리티 시스템과 경로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차후 출현하는 모빌리티 시스템들은 복잡한 교차가 증가하고 보다 광역화 될 것이라 예상하면서, 셀 수 없는 연결 관계 속에서 인간과 조합된 사물에 초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빌리티 시스템들은 점차적으로 전문 지식에 기반을 두게 된다. 특히 모빌리티 시스템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있으며, 이 시스템은 개인 정보의 조각들로 인간을 재형성한다. 궁극적으로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부동적인’(immobile) 물질세계 그리고 부동적인 플랫폼의 상호 의존적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부동적인 시스템들의 조합에서 모빌리티 경험을 하게 되고, 이 시스템들은 의도하지 않은 공현존의 순간들을 제공한다고 보았다(pp. 110-115).



모빌리티 패러다임과 일상 


모빌리티 패러다임에 대한 상세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침투한 모빌리티에 대한 감응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새로운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대표적 사례는 네 가지 층위에서 살펴 본 ‘닭 모양의 주전자를 구매하는 이야기’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샤론 주킨(Sharon Zukin)이 미국 맨해튼에서 고급 ‘유럽풍’ 상점이 모여있는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주전자를 발견한다. 그녀는 산책이라는 첫 번째 모빌리티 양식을 통해 그 주전자를 시각적으로 소비할 뿐 구매하지는 않는다. 이후 투스카니에서 수십 개의 똑같은 주전자를 보지만 그녀는 관광지에 즐비한 키치로 치부한다. 여기서 주킨의 모빌리티는 걷기이지만, 그녀는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주킨은 하나의 주전자를 구입한다. 이후 그녀는 그러한 형태의 주전자에 대한 지식을 키워 감식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는 비슷한 스타일의 주전자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다. 그녀는 여러 행선지에서 두세 개의 주전자를 구입한다. 마지막으로 주킨은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이베이(www.ebay.com)로 접속하여 상업적 구매자 또는 판매자가 된다. 주전자는 더 이상 취향을 대변하지 않고, 기념품도 아니며, 감식 행위를 통한 수집품도 아니다. 금전적 이득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주전자 하나를 사는 행위도 지극히 다른 모빌리티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다(pp. 119-120).


우리의 일상은 이미 모빌리티에 잠식되어 있는지 모른다. 정태적 의미의 공간과 지역, 도시, 국가를 넘어 모빌리티는 쉴 새 없이 새로운 시스템과 규합하면서, 동태적 유형의 모빌리티 방식을 양산하고 있다. 실제 개인의 일상적인 동선이 스마트폰 GPS 장치를 통해 기록되고, 이 정보들을 모은 빅데이터가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고, 이 새로운 모빌리티 자본은 어리가 주목하고 있는 모빌리티 패러다임을 강화 시키고 있다. 한 개인의 영역뿐이겠는가. 요일별 시간대별 지하철의 혼잡도는 그날의 날씨 정보와 연계되어 대중교통 이용 트렌드를 예측하고, 여름과 겨울 성수기의 항공권 예매 경로와 관광지 숙박 통계는 해당 시장의 평일/주말 단가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모빌리티라는 렌즈로 바라보는 현대 사회는 복잡하게 교차하고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모빌리티 패러다임 속에서 보다 명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내일 아침 약속 장소에 안정적으로 도착할 수 있는, 가장 게으른 출발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오늘 밤도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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