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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햇살 Dec 29. 2023

팥죽 먹기 싫어요.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 추운 계절이 점점 깊어지며 지나가고 있다.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 일 년의 이십사절기 중 이십이 절기인 동지,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간밤에 싸락눈이 내렸다. 서걱거리는 눈이 얇은 설탕처럼 거리를 살포시 덮고 있다. 검은 외투를 여미며 땅바닥에 발자국을 도장처럼 찍으며 걸어갔다.


아침부터 주방은 분주하다. 팥을 깨끗이 씻어 물에 살짝 삶은 다음, 그 물을 버리고 팥을 푹 삶는다. 가스레인지가 거대한 푸른 불빛을 내뿜어 공기 중에 몽글몽글 수증기 알갱이들로 가득하다. 천정의 배기 후드가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다.


짙은 보랏빛으로 부서지는 팥 알갱이들이 서로를 껴안고 보듬고 있다. 다 삶아진 팥은 촘촘한 철망 소쿠리에 담는다. 큰 나무 주걱으로 저어서, 팥물은 그릇 아래에 빠지도록 해야 한다. 팥 알갱이들이 주걱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미세한 팥물과 진액이 아래로 빠진다. 성글한 알맹이와 얇은 껍질들만이 철망 소쿠리에 덩그러니 남는다. 부드럽고 진한 팥물을 물과 함께 희석하여 팥죽 물을 만든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얀 쌀가루가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물로 쌀가루를 반죽하여 사정없이 손으로 하얀 덩어리를 치댄다. 누르고 주물러서 말랑말랑하게 한 반죽을 길쭉한 떡가래처럼 만든다. 떡가래 반죽을 엄지손가락 한마디만큼 듬성듬성 썬다. 손바닥 위에 반죽 한 알을 올리고 비벼서 작은 새알심을 만든다. 두 손바닥 안에 있는 작은 점성의 반죽은 비비는 손길 위에 예쁜 새알심으로 완성된다. 수십 개의 동그란 새알심은 은빛 쟁반에 가득 쌓인다. 마치 눈을 뭉쳐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그들끼리 보듬고 껴안고 있다.


솥에 물을 가득 채운다. 순백의 새알심을 끓는 물에 넣으니 새알심이 물 위로 동동 떠오른다. 익은 새알심을 떠서 찬물에 헹구어 소쿠리에 담아 놓는다. 팥물은 솥 안에서 끓어오르고 진한 보랏빛 색깔의 물 위로 익은 새알심을 넣고 끓인다. 왕관 모양의 물방울 입자가 공기 중으로 뛰어오른다.


어르신들의 식판에 팥죽 한 그릇이 제공된다. 걸쭉한 팥죽 한 그릇이 생활실 식탁에 차려진다. 모두 즐거워하며 맛있게 드신다. “나이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며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식사하신다. 밖에는 쌀가루 같은 눈이 하늘하늘 내리고 있다. 요양원에서 제일 나이 많으신 어르신은 팥죽을 안 드신다. “나이 한 살 먹으니, 팥죽 먹기 싫어요.”라며 머리를 흔든다. 그녀의 머리에도 쌀가루처럼 백발로 가득하다. 이제 곧 백 세가 되신다.


백 살까지 인생을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온다. 팥죽의 달큼한 단맛이 퍼지며, 입속에서 새알심이 산산이 부서져서 부드럽고 달콤하다. 어르신들이 내년에 돌아오는 동짓날에 모두 팥죽 한 그릇씩 먹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생은 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인데 이 선물들을 낭비하고 살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각자의 인생의 잔이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난의 잔이 반복된다. 너무 즐겁다고 자랑할 것도 아니며 너무 힘겹다고 원망할 것도 아니다. 생의 잔의 깊이와 높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백 세까지 산 그녀의 인생에는 앞으로는 더 덤덤히 견딜 수 있는 강건함과 지혜를 가졌으리라.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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