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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갈 Feb 27. 2022

연극 <엉클 바냐>

we shall live, we shall rest. 02.25

연극의 영상화


팬데믹으로 인해 공연이 중단되었던 <엉클 바냐> 팀은 연극의 효과적인 영상화를 통한 전화위복을 보여준다. 연극에 없는 롱샷과 미디어샷을 넘나들어 영화적 기법으로 관객의 시야를 다각화하는 동시에 인물들의 등퇴장을 컷편집 없이 보여주거나 장의 마지막에 독백 장면을 넣는 등 연극 고유의 특성을 유지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연극과 편집이라는 두 개념이 서로의 영역에 적절하게 스며들었다. 이미 팬데믹 전부터 연극을 포함하여 뮤지컬, 무용극과 같은 공연은 영상화되고 있었다. 공연의 현장성과 일시성은 다른 예술과의 차별점이지만 기록과 전파 그리고 디지털 매체들의 콘텐츠 다양화를 위해 해외에서는 꽤 많은 유명 공연들이 영상화 혹은 스트리밍됐었다. 그러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이후 관객들과 ‘지금, 여기’의 감각을 공유할 수 없는 공연 제작팀들에게 영상화는 선택이 아닌 불가피한 결정이 되었다. 트라팔가 <엉클 바냐>의 경우, 프로덕션과 제작팀은 BBC arts와 손을 잡고 완성도 높은, 연극적이면서 영화적인 공연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이를 국립극장에서는 NTOK LIVE+라는 해외 우수 공연 발굴/배급 기획작으로 선보여 관객들이 극장에서 거대한 스크린으로 공연을 함께 보는 집단적(collective) 경험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극장, 무대, 연극, 관객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질 수 있었다. 비록 영상화된 공연이 현장성을 향한 관객들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한다 해도 팬데믹을 극복하는 공연예술계의 해법임은 분명하다.


<엉클 바냐>


바냐는 시골의 한 집에서 조카 소냐, 어머니 마마, 그리고 유모 나나와 살면서 가정과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이 집안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47년 째 살고 있는 그는 결혼은 하지 않았고 집 밖에서의 별다른 사회적 역할도 없이 그저 소냐와 함께 영지를 관리하고 작은 수익을 내는 것으로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매일 비슷한 하루들’ 속에서 유모 나나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집안일을 하고 사람들을 보살폈다. 특별하거나 넉넉해 보이는 삶은 아니지만 그들을 성실히 살게 하는 규칙적인 일상이 존재했다. 이따금 가난한 지주 일리치와 의사 아스트로프가 집에 놀러왔다. 아스트로프는 극의 시작부터 나나에게 자신이 현재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하며 괴로워하고 술에 의존하게 되는 의사다. 그러다 소냐의 아버지인 세레브랴코프 교수와 그의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아내 옐레나가 시골로 돌아오면서 바냐의 집에 균열이 생긴다. 새로운 갈등이라기보다 인물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분노와 우울감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게 된다.


권태와 선택 - 허무만 남은 지난날의 헌신


<엉클 바냐>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쳇바퀴 같은 시간 위에서 권태로운 생활을 보낸다. 그들은 권태를 받아들이는 인물과 거부하는 인물로 나뉜다. 바냐는 권태의 실상을 마주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은퇴한 세레브랴코프 교수와 옐레나가 바냐의 집에 살게 된 후로 집안의 규칙, 즉 일상의 약속들이 없어졌다. 식사 시간, 노동 시간 등이 정해져있던 계획적인 삶 대신 온 식구들이 교수만의 시간대를 맞추게 되었다. 교수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갖춘 식자층으로서 바냐 집안의 유일한 희망과 같은, 이 집안을 무료한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이었다. 그가 도시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족들의 뒷바리지가 있었다. 교수에게 영지의 수익으로 꾸준한 경제적 지원과 필사와 번역, 제본 등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바냐는 교수가 조금의 명망도 없이 ‘아무것도 아니었다(nothing)’는 것을 알고 크게 허탈해했고 교수가 영지를 팔고 주식과 증권 투자를 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는 쌓여오던 분노가 폭발하여 교수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이때 바냐 역을 맡은 토비 존스의 감정 연기가 매우 중요해지고 또 기대되는 이유는 교수를 향한 바냐의 분노가 복합적인 감정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교수가 바냐 자신이 일평생 관리한 영지를 교수의 소유물처럼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분노, 교수의 딸 소냐와 첫 번째 아내였던 바냐의 누나를 향한 연민, 희망의 상징이 무용지물이 된 허무, 그로써 지난날의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안타까움, 열등감, 끝없이 이어질 권태에 대한 두려움, 그로써 커지는 자기 혐오가 섞여 있다. 바냐는 연민과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교수가 혐오스러웠지만 사실 그 화살은 결국 바보 같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고 이를 교수에게 총을 쏘는 것으로 해소하려 했다. 잘못된 헌신이 완전히 증명되어 분노가 오히려 고요한 자기 혐오와 무력감으로 내려앉게된 순간은 두 번 일어난다. 한 번은 교수의 “누가 나를 지원해달랬냐” 식의 발언이고 두 번째는 바냐의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어머니의 “너는 남자로 태어난 것을 써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대답이다. 둘다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바냐는 자발적으로 시골에서의 집과 영지 관리를 택한 동시에 희망찬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를 하기도 한 것이다. 그는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다. 누가 궁극적으로 권태와 무료함을 바라며 노동을 할까. 누가 선택의 실패를 맛보고 싶어 할까.


사건 - 결실 없는 오늘날의 사랑


권태 다음으로 극을 지배하는 감정 혹은 상태는 사랑이다. 바냐, 소냐, 아스트로프와 옐레나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 바냐와 아스트로프는 옐레나를, 소냐는 아스트로프를, 옐레나 또한 아스트로프를 살짝. 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권태 아래 들끓고 있던 감정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무너져내린다. 사랑을 확신하고 상대에게 확인하고 서로 엇갈리는 마음을 직면했을 때 자신은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결핍은 사랑의 방향성에 따라 포기와 공격이라는 두 양상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바냐와 소냐로 둘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속상함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아마도 바냐와 소냐는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보다 높이 평가하여 그들에게 사랑 ‘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고’ 싶어했던 아스트로프는 옐레나가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소냐의 새엄마이자 어른이 된 도리로서 아스트로프가 소냐를 이성으로 좋아하는지 대신 묻자 옐레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기 시작한다. 옐레나를 여우라 부르며 그녀가 아스트로프의 애정을 눈치채고 이용했다면서 화를 낸다. 또한 옐레나를 목표가 없고 권태의 원흉인 사람처럼 말한다. 이는 옐레나가 소냐에게 자기 변호를 하던 장면이 떠오르게 하여 옐레나에 대한 연민을 자아낸다. 앞전에 옐레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돈을 보고 결혼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진심으로 교수를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절절한 고백을 했었다. 관객이 거의 유일하게 옐레나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던 시간이었기도 하다. 이처럼 네 명의 인물들은 열정 없는 일상과 열정 있는 사랑이 맞물린 틈에서 시들어버린 꽃처럼 존재한다. 때로는 보드카 한 잔을, 직접 치즈를 얹어 건넨 식빵을, 서로에 대한 호의를 영양제 삼아 아주 잠깐동안 활기를 찾는 그런 꽃처럼.


희망


극의 마지막을 전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은 소냐다. 교수와 옐레나, 아스트로프가 바냐의 집을 떠나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집안에는 적막만 차 있다. 소냐는 다시 일을 하자며 그동안 밀린 장부와 계약서 등의 종이들을 갖고 오고 바냐는 종이를 한 장씩 살펴본다. 물론 바냐는 무력감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여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그런 바냐를 본 소냐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래도 우리의 삶을 계속될 것이며, 우리가 볼 세상은 아름답고 찬란하고 우리는 쉴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소냐가 세상의 엉클 바냐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뻔하거나 너무 허황된 말처럼 들리겠지만 12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 지금까지도 다뤄지는 이유에는 분명 그러한 위안이 시대를 불문하고 주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연극을 포함한 문화예술의 역할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The world we will see is beautiful, radiant, and dignified.


*체홉 <갈매기>와 <엉클 바냐>에 대해 아주 짧게.


<갈매기>와 <엉클 바냐>에서는 시골 생활의 무료함과 도시의 활기가 비교되고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있으며 인물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있다. 그들에게는 원망과 자기 혐오가 있다. 권태가 장악했으나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있다. 집단 우울감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마냥 편안한 작품들은 아니지만 체홉 작품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희극적 비극의 면모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갈매기>에서는 도박을 하는 장면, <엉클 바냐>에서는 일리치, 아스트로프, 바냐가 기타를 치며 노는 장면이 그러하다. 또한 어느 하나 허투루 존재하는 인물이 없다. 인물들 간의 관계성을 보는 재미가 있고 내가 누구의 시점으로 극 중 생활을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서도 감상이 달라질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인간상들은 현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정말 체홉의 작품들은 각 세대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읽혀지고 상연되고 <갈매기>의 뜨레블레프나 니나, <엉클 바냐>의 바냐나 소냐는 각자의 성격과 상황을 대표하는 인물로 (‘~ 같은 인간’) 남을 것이다. 그래서 클래식은 영원하다. 

-클래식 never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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