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때문에 주말농장을 제때 가지 못했다.
몇 주째 열매를 내어주지 않더니, 그새 푸짐하게 달린 보라색 가지, 늙은 오이와 각종 채소!
끝나지 않을 듯한 폭염과 곳곳에 홍수로 채소 값이 금값이라는데…. 인간은 편리할 때, 시간 날 때,
힘들지 않을 때, 텃밭 채소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텃밭 생물들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
세 평 남짓한 땅에서도 생명체가 이렇게 풍성하게 자라주다니!
가지 오이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까지…. 여전히 진한 향을 앞세우며 널따란 잎을 자랑하고 있는 들깻잎.
까마중 열매, 해바라기꽃까지 골고루 열어주고 야무지게 피워내고 있었다.
수확한 것은 딸에게 절반을 나눠주고도 푸짐했다.
옆집에 나눠주기는 모양이나 상태가 곱지 않아서 내키지 않았던 것.
뜨거운 여름날, 숨을 헉헉거리며 열매를 따던 순간을 생각하면, 늙은 오이 한 조각도 허투루 버릴 수 없었다. 모두 끌어안고 어떻게든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고 싶었다.
땡볕 텃밭에서 따온 늙은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
그때 문득 내 안에 기억 속의 사람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음식이 떠올랐다.
바로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늙은 오이 바지락 들깨탕! 온 식구가 함께 나눠 먹었던 시간과 공간!
여름날 매캐한 모깃불 냄새가 짙게 깔렸던 시골집 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릴 적, 엄마는 돌확에 통 들깨와 불린 쌀 몇 줌을 주먹만 한 공이 돌로 곱게 갈아내셨다.
체에 밭쳐낸 뽀얀 들깨 국물은 우리 가족의 귀한 보양식이 되었다.
팔 남매와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할머니까지, 열세 명이 북적이던 시절!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늙은 오이와 바지락 살이 들깨 국물과 함께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고소한 향과 바다 냄새가 어우러진 국물은 무더운 여름을 견뎌내게 해 주었던 힘!
엄마가 비지땀을 흘리시며 큰 가마솥에 넘치도록 끓여주셨던 들깨탕이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여름 맛이다!
내 고향은 해산물이 흔치 않았다. 엄마는 꼭두새벽에 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시장에 걸어서 가셨다.
여름밤, 마당엔 모깃불 냄새가 자욱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고구마순을 벗기던
내 손등엔 모기가 수시로 내려앉았다. 팔과 다리는 벌겋게 물리고, 손끝엔 끈적끈적한 진액이 달라붙었다.
“얘야, 멈추지 말고 계속해.” 엄마의 말에 툴툴거리며 다시 손을 놀리던 어린 나!
가르마 탄 머리카락처럼 단정하게 묶은 고구마 줄기를 함지박에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터벅터벅 걸어가셨던 어머니! 시장 작은 가게에 물건을 넘기고, 돌아오는 길에 바지락 살을 사 오셨다.
그리고 늙은 오이와 함께 푹 끓여주셨던 들깨탕! 여름날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식구들이 함께 떠먹었던 고소한 국물 맛을 생각하니 저절로 혀가 날름거려진다.
오늘 아침, 나도 그 맛을 흉내 내어 들깨탕을 끓였다. 꽤 맛이 좋았고 한여름 입맛 없을 때 만들기 쉽고 영양도 탁월했다. 냉장고에 시원하게 넣었다가 먹으니 고소한 맛이 더 진해졌다.
특히 손주들도 좋아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내가 끓인 늙은 오이 바지락 들깨탕
예전에는 시장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늙은 오이!
기껏해야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좋은 오이소박이, 만들기 쉽고 속까지 시원하게 꿰뚫을 듯 새콤달콤한 오이 미역냉국, 아작아작한 소리와 저장성이 좋아 두고두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오이장아찌만 생각했는데….
세상에 필요치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제 역할을 하며 소리 없이 얼굴을 내민다.
단지 사람들은 어떤 채소는 어릴 때 좋아하고, 어떤 채소는 늙수그레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은 완전히 성장을 마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때 좋아한다.
단지 우리가 몰랐고 그런 음식을 먹어 보지 않았거나 기억나지 않을 뿐!
이렇게 늙은 오이가 색다른 맛을 내는 고소한 탕이 되다니!
게다가 바지락 대신에 다른 해물, 새우 홍합 전복 등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어 더 좋다.
고기 좋아하는 사람은 소고기뭇국처럼 끓여도 된다.
끓일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늙은 오이 들깨탕, 이보다 좋은 여름 보양식이 또 있을까?
늦게 발견했지만, 이번 여름에 만든 들깨탕은 요리하기가 쉬워서 맛이 탁월해서
어떤 재료로도 대체할 수 있어서 올여름 우리 가족의 최애 음식이 되었다.
하마터면 제대로 쓰이지 못할 뻔했던 금값 채소가 다시 밥상에 오르니,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다음 날 손주들한테 가져다줄 생각으로 새송이버섯도 넉넉하게 넣어 끓였더니
그야말로 맛이 환상적이었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머리가 좋아지는 거야. 너희 엄마 머리 좋지?
엄마도 할머니가 해준 새로운 음식 먹어서 머리가 좋아졌어!”
“그러면 나도 먹을 거야.”
“내가 더 많이 먹을 거야.”라며 아옹다옹하는 모습도 정겹기만 하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도 맛나게 먹으며 할머니에게 생글생글 웃어주니,
하루의 피곤함이 금세 사라졌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날 할머니가 만들어 준 별식을 받아먹으며 참새 입으로 조잘조잘 떠드는 손주들!
언제 어디서 만나든 “이것은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음식 맛이야.”라고 이야기할 거리!
나에겐 이런 꼬맹이들의 순수한 칭찬이 작은 행복이다!
손주들과 함께 먹은 추억만으로도 내 마음은 오래도록 훈훈하고 든든할 테니까.
오늘 아침 들깨탕을 먹으며 문득 소원했던 언니 오빠에게 안부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와 형제들이 옴닥옴닥 모여 앉아 함께 먹었던 그때의 밥상처럼,
또 다른 좋은 시간을 만들어 가야지. 음식과 기억은 언제나 사람을 이어주는 끈!
들깨 향처럼 깊고 은은하게 오래가는 정! 그 맛을 오늘도 지켜가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름밤의 냄새와 엄마의 목소리가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