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신나는 흥 머니!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논다. 손주들만 만나면 흥 머니의 생각 주머니는 자꾸만 커진다. 풍선처럼 둥둥 날아가기도 하고, 열기구처럼 부웅 떠다니는 손주들 생각뿐! 딸은 흥 머니가 뭐냐며, 인터넷에도 없는 단어라고 난리다. 그렇지만 손주들이 오면 종종거리는 놈, 날뛰는 놈, 소리치는 놈 삽시간에 온 집안이 들썩거리고 초토화된다. 그 순간 할머니의 머릿속은 활짝 열렸다. “이놈들과 어떻게 놀지? 이놈들과 어떻게 재밌고 신나게 놀지?” 오로지 함께 놀 준비에 온 신경이 쓰인다. 그들이 온다는 날짜를 꼬박꼬박 기다리며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나름대로 생각 주머니를 열심히 쥐어짠다. 음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시원찮은 그림도 그려 본다.
3~4년 전 추석에 우연히 장기자랑이라는 이벤트를 생각해 냈고, 처음으로 포스터도 만들었다. 그때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11명 가족의 혈액형이 딱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OX 팀이 아니라, 혈액형으로 O형 팀과 B형 팀으로 나누어 이름을 써넣었다. 수적으로는 O형 팀이 4:7로 열세였지만 그래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자부심이 빵빵해 파이팅을 열심히 외쳤다.
그렇게 해서 어색하지만, 처음으로 장기자랑 대회를 열었다. 애들도 흥분하고 제일 흥분한 것은 기획한 흥 머니, 바로 흥이 많은 할머니였다! 그 후 명절 때마다 열리는 장기자랑 대회에 관한 관심이 손주들 머릿속에 꽉 차 있는 듯….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리허설도 하고, 공연 제목이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 기대감이 더 커졌다.
이번 2025년도에는 나의 아이디어 공장에 다시 한번 시동이 걸렸다. ‘포스터에 공간을 남겨 두자! 어른인 할머니가 모두 채워 넣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여기에 자기가 출전할 순서, 이름과 공연 제목을 직접 써넣어.”라고 말하자, 그 생각만으로도 왁자지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딸도 이런 엄마 아이디어가 놀랍고 제일 재미있단다. 애들은 명절 전에 간간이 만났을 때, “할머니? 나는 이런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라며 언질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효과는 대단했고 서로 눈치 보며 순서 짜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큰사위는 시비를 건다.
“어머님, 장기자랑이 너무 음악적인 것으로만 치우쳐 있어요.”
“그렇지 꼭 장기자랑이 노래 부르고 연주하고 그럴 필요는 없지. 뭐 좋은 수라도 있나? 자네는 요리를 잘하니, 요리 쇼라도 하는 게 어때?”
“어머님, 이참에 웍 다루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요리 불 쇼라도 해야 할까요?”
사위의 말에 배꼽 빠지게 웃고 한바탕 더 웃었다. 점점 생각이 확장되고 나날이 재밌어지는 그런 장기자랑! 이렇게 우리 가족은 매년 상상 놀이터를 만들어 간다.
이번에는 큰손자가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반주는 큰딸이 했다. “이모도 한 번 해봐요?” 하는 조카의 부추김에 즉석에서 작은딸은 어렸을 때 배웠던 쉬운 바이올린곡을 연주했다. 우리 집 명절 장기자랑 프로젝트는
<자연인>, <동네 한 바퀴>, <내 고향 6시> 티브이 프로그램처럼 장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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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모습을 할머니는 오랫동안 꿈꾸어 왔었지! 즉석에서 “사회자 할 사람 손들어?” 하니 큰딸은 얼른 “우리 둘째한테 기회를 줘요.”라며 내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순발력 있게 사회도 제법 잘 본다. 가족 모두는 마냥 웃고 집중하고 몰입했다.
얼핏 보니 바이올린 연주,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치고 내려와도 만족감은 100퍼센트인 다섯 살 손녀의 피아노 연주. 발레 학원을 절대로 끊지 않는 일곱 살 손녀의 발레 공연. 그리고 막냇손자의 동요 부르기와 할머니의 팝송 부르기까지 아주 풍성하고 그럴듯한 음악회가 되었다. 손주들이 무대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렇게 한 번 끝나니 숫기가 없어 제일 힘들어했던 다섯 살 손녀는 이번에는 반대 순서로 다시 한번 해보자고, 자기가 사회자를 해 보겠단다.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울 일인가? 우리는 방방 뛰며 또다시 반대 순서로 한 번 더 장기자랑을 시작했다. 조그만 어깨를 쭉 펴고 장난감 마이크를 들고서 “자, 다음은 할머니 차례예요.” 하고 또박또박 외친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손녀에게 쏠렸다. 그 작은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거실 가득 퍼졌고 할수록 재미는 커졌다. 손주들이 진심으로 발표하는 모습은 어떤 무대보다 더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 소중하고 귀해 마음 한편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2025년 을사년 설날 손주들이 쓴 공연 제목과 손녀들의 그림과 종이 접기로 꽉 찬 포스터)
더 흥미진진한 것은 두 손녀가 빈 공간에 그림도 채워놓고 종이접기도 해서 자꾸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이들은 판을 깔아 주기만 하면, 스스로 의견을 내고 협동하면서 무대를 만드는구나! 좀처럼 말이 없는 남편도 오늘따라 들떠서 말이 많다. 내가 기획한 프로젝트가 손주들과 함께하는 상상 놀이터에서 이렇게 판이 이루어지다니!
언젠가는 아이들의 실력은 자꾸 올라가고, 어른들의 실력은 줄어들어서 그들의 잔치가 될 것이다. 언제나 환대할 결심을 하는 할머니! 아이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에 웃음꽃이 만발한다. 신나는 할머니는 내년에는 무얼 할까? 벌써 아이들과 머리 맞대며 기획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이렇게 상상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언젠가는 아이들 스스로 놀이판을 깔 것이다. 그때는 어른들이 끼어들지 않아도 협동과 공감으로 자기들만의 판을 만들어 갈 것이다. 명절마다 함께하는 게임이 즐겁듯, 노는 문화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어디서든 신나게 놀 수 있겠지! 이런 작은 놀이가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발판이 되고,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