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변덕이 죽 끓듯 하다. 마음도 몸도 축축 처지고 우울하지만, 손주들은 놀이터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만 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양육자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하니 늘 활기가 넘친다. 요즘은 ‘놀이터 아빠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놀아주는 아빠!
“공룡이다. 도둑이다.” 하며 목소리로 제압하고 웃음 터지게 하는 아빠!
묵묵히 벤치에 앉아 안전하게 노는지 눈으로만 지켜보는 아빠까지!
우리 손자는 자주 남의 아빠 셔츠를 치켜들고 얼굴을 파묻으며 너무 행복해한다.
그 아빠는 손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알이다. 누구 알이지, 리한아?” 하고 자기 아들에게 묻는다. 손자는 숨죽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친구가 “유준이 알이요.”라고 대답하면 그는 등 뒤로 손을 내밀어 손자 엉덩이를 받치고 업어준다. “삼촌 허리 아파 안 돼. 빨리 내려” 떼어 놓으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손자는 게딱지처럼 딱 붙어 웃으며 버틴다. 이런 장면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맙고 따뜻하든지! 딸은 종종 말한다. “놀이터 아빠들이 우리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요즘 아빠들이 육아에 대한 태도나 관심이 우리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우리 사위는 유연근무제로 아침에 남매를 등원시키고 출근해 늦게 퇴근해서 놀이터에 잘 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출장 갔다가 일찍 퇴근해 오랜만에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함께 보게 됐다. 멀찍이 서 있던 사위를 보고 활달하고 적극적인 한 아빠가 “유준이 아버님, 오늘 도둑 역할 좀 해주세요!” 하며 게임에 초대한다. 도둑 잡기란 한 사람이 도둑이 되고 나머지 애들은 경찰이 되는 게임이다. 도둑은 무조건 도망치고 아이들은 뛰어다니기만 하는 놀이로 단순한데 굉장히 재밌어한다. 새로운 아빠 등장에 한껏 흥분한 어린이들!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며 “도둑이다. 도둑 잡자!” 외치며 무섭게 달려드는 애들에게 둘러싸여 도망칠 수밖에….
평소 다른 아빠나 엄마 할머니는 안전한 놀이터 안에서만 도둑 잡기를 한다.
우리 사위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하긴 했는데, 놀이 공간에 가득한 사람들 앞에서 하기는 정말 조심스러운가 보다.
자꾸만 놀이터가 아닌 울타리 밖, 간이 주차장 쪽으로 도망치는데….
그곳은 간간이 택배차가 드나들어서 복잡하고 위험한 곳!
그러나 아이들은 경찰이 돼서 도둑을 잡으러 자연히 밖으로 나가게 된다.
“유준이 아빠, 그곳은 위험하니까 놀이터 안쪽으로 들어와.” 다급하게 소리쳐도 쉽게 안전한 놀이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도둑 잡기처럼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일종의 품앗이다.
자기 마음과 달라도, 자녀들 기 살려주려고 최선을 다한 아빠!
부끄러움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어린 친구들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놀이터를 가득 메웠다. 놀이터에 출근은 하지만 놀이까지 해주는 아빠는 여전히 많지 않다.
그날,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을 띠고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도망 다닌 모습은 자신에게도 애들에게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참 귀한 장면이었다. ‘번데기에서 나비로 탈바꿈하듯, 얼마나 부끄러움의 농도가 짙었을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작은사위 모습이 떠올라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준 용기! 어려운 일을 기꺼이 해낸 행동 자체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요즘 시대의 ‘좋은 아빠’가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물론 어떤 아빠라도 이런 기회와 상황을 주면 기쁘게 해낼 것이다.
요즘 사회는 육아를 돕는 아빠가 아니라, 함께 육아하는 아빠.
아이와 함께 땀 흘리고 눈을 맞추는 아빠.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놀이에 뛰어드는 아빠를 원한다.
이런 모습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육아하는 많은 부부가 이런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직장 문화, 제도, 사회 인식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아빠의 육아 참여가 선택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실질적인 지원이 더 넓고 촘촘히 펼쳐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