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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안유 Sep 04. 2021

다른 이름의 파프리카 수프

안나의 브런치 (2)

실용적인 일이 강조되는 아침과
곧 해가 진다는 불안감이 덮쳐오는 오후 사이의 혜택 받은 시간,
이때 엄마와 브런치를 먹는다.


몇 년 전, 한 교수님이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내가 삶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냐고. 지평 위로 내리 꽂히는 번개처럼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번뜩였다. 처음으로 그 사이에 우선순위를 메겨보는 것이었지만 부모님의 상실이 자연스럽게 맨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내게 엄마와 아빠가 많은 것들을 남겨주었으면 한다. 손때가 묻은 기구, 즐겨 입던 옷, 그날의 생각을 적어둔 일기장, 좋아했던 책, 예뻐서 주워온 돌멩이. 한 손에 쥐고 가끔씩 만지작거릴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았으면 한다. 아빠가 재킷을 버릴 때마다 하나씩 몰래 주워두는데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기어코 가져다 버리더라. (한 3년 정도 시도했는데, 며칠 전 드디어 하나를 성공적으로 취득했다.)


엄마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도를 했다. 그런데 항상 모래알 사이로 시간과 기억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매년 차곡차곡 만년필과 일기장을 선물하고, 멋진 식당, 고즈넉한 카페, 바람이 부는 산책길을 찾아가고 저녁마다 일기를 쓰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열 장이라도 채워졌을까? 내가 느끼는 엄마는 다소 무생물 같은 부분이 있다. 무기력함과는 결이 다른데, 엄마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뉴턴의 제1법칙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다. 그러니까 내가 끌어당기거나 떠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엄마는 빵을 좋아한다


그런 엄마가 처음으로 이번 여름, 나를 어떤 동네빵집으로 데려갔다. 블로그 후기까지 찾아보면서 열정적으로 오픈 시간부터 파는 빵 종류까지 찾아봤다고 말을 해줄 때 매우 놀랐다. 지도를 보며 앞장서 길을 안내할 때는 거의 기절할뻔했다. 그러니까 이 브런치 프로젝트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을 해보라. 그리고 이렇게 멋지게 글을 쓰다니! 엄마 인생의 절반 정도밖에 함께 살지 못한 나는, 아직 엄마를 절반 정도밖에 알지 못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냥 일주일에 한 끼였을 수도 있지만 굳이 일주일에 한 번씩 브런치!라고 정해둔 건, 내가 브런치를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일이 강조되는 아침과 곧 해가 진다는 불안감이 덮쳐오는 오후 사이의 혜택 받은 시간, 하루의 중간에 창문같이 존재하는 그때가 나는 참 좋다. 한 사람의 삶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엄마와 나의 시간은 딱 브런치를 먹을 시간이다. 하루를 잘 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아침이 이제 막 지나갔고, 아직 오후의 나른함에 몸을 내던지기에는 이르다.


나는 항상 미래를 위해 살아왔다. 내게 할 일이 너무 많은 것같이 느껴졌고, 내가 쉬는 동안 쉬지 않고 달려 나가고 있을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채찍질했다. 현재는 항상 앞으로 달려 나가는 과정에 스쳐 지나가는 찰나였다. 그러다가 코로나로 의도치 않게 일상에 쉼표를 찍어보니 문득 내가 흘려보낸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언제 무슨 일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메마른 일상의 갈피에 촉촉한 여유를 조금 부어보려고 한다. 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을 완주해야 하니까. 엄마와 브런치를 먹으며 중요한 것들에 대해 재고해보려 한다.



8월 셋째 주 - 이번 주의 메뉴는 파프리카 수프였다.


무 간단한 요리인 듯 해 이것저것 덧붙이다 보니, 주객이 전도되어 한 상 가득 뭔가가 차려졌다. 파프리카 수프는 빨갛고 노란 피망을 오븐에 흐물흐물 구워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15분 타이머를 세 번 돌리는 동안 함께 마실 와인과 곁들일 빵도 한 덩이 사 온다. 감자도 깎아 삶아두면 좋다. 요리할 때, 땅 밑에 자라는 것들은 찬물에 넣어 끌이고 땅 위에 자라는 것들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넣는다. 양파와 당근도 이리저리 볶아낸다. 그리고 모두 블랜더에 넣고 갈아버리면 다 끝난다. 냄비에 옮겨 담아 치킨스톡과 파마산 치즈를 추가하면 이제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다. 재료의 양은... 모두 그저 적당히.




빨간 파프리카를 세워놓고 보니 참 예쁘다. 분이 좋아지는 색채를 뿜어낸다. 예전에는 피망을 참 싫어했는데 요즘은 없어서  못 먹는다. 소스로, 볶음으로, 샐러드로, 맛있게 먹는 방법이 참 많다.


파프리카와 피망은 같은 채소다. 사실 미국에서는 벨 페퍼, 영국에서는 캡시컴이라고 부르고 고춧가루처럼 말려서 빻은 향신료를 파프리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계피와 시나몬처럼 그 둘은 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 엄마와 요리를 해 먹는 이 한 끼 식사에 '안나의 브런치'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사실상 변한 건 없지만 달라지는 건 있다. 이렇게 소리 내어 부르기 전까지, 잊혀버릴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의 모든 순간이 무엇이 되었으면 한다. 잊히지 않는 하나의 영원이 되고 싶다.


엄마가 보내준 강아지 구름


글을 쓰고 발행한다는 건 내게도 새로운 경험이다.


새벽의 이슬과 함께 휘발될 술자리의 토론. 공책을 뛰어다니는 단어들을 꿰어 대충 정렬해본 일기. 머릿속으로 나누는 대화. 이런 곳들에 안주하는 게 익숙한 내 생각을 세상에 내던져야 한다니. 누군가가 읽을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편의 편지로 빚어내려니 참 어렵다. 이 작은 도전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어서 위안이 된다.


요리는 시작보다 끝이 쉬운 세상의 유일한 게 아닐까. 맛있게 먹으면 되니까. 야심 차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몇 시간 뒤의 결과물은 너무 짧고 너무 뒤죽박죽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꽉 찬 한 그릇을 먹은 기분으로 떠나보내고 싶은데 참 쉽지 않다. 썼다 지웠다 다시 써보지만 마침표 앞에서 난 시지프스가 된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잘 못하는 게 낫다고. 애매하고 갑작스러운 끝이지만 여기서 마무리하고 발행 버튼을 눌러보려고 한다. 오늘 담지 못한 글은 다음 주에 써보면 되니까!


(글 2: 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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