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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l 22. 2024

<스위트홈> 쓸모없는 사람

<스위트홈>은 사람이 괴물로 변하면서 일반적인 사회가 붕괴된 이후의 생존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이곳에는 일반적인 상식이 아닌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의 양식이 자리 잡는다. 이를 테면 약이랄 것이 없으니 아플 때 만병 통치약처럼 항생제를 먹는다던지, 생존에 필수인 물을 아껴야 해서 씻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줄인다던지, 괴물과 싸울 수 있는 힘센 사람이 식사를 많이 먹는다던지 하는 것이다.

ⓒ 스위트홈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이러한 생존물에서 언제나 배제되는 사람 유형이 있다. <스위트홈>에서는 가정 폭력에 길들여진 아줌마, 9살과 6살에 극한 생존을 마주한 남매, 자신과 함께 사는 강아지만 아끼는 젊은 여성, 5년 간 고시 생활을 끝으로 9급 공무원에 합격했지만 사회가 붕괴해 절망하는 남성,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미용에 집착하는 남성이 그렇다. 이러한 배제는 언뜻 보면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괴물에 맞설 힘과 용기도 없고, 지식이나 치료와 같이 생존에 도움 되는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다. 즉 쓸모가 없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대부분 생존물에서는 주인공이 쓸모없는 사람 대신 희생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쓸모의 쓸모를 고민하도록 한다. 나 역시 이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저런 사람들 오히려 없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먼저 '무쓸모'부터 정의가 필요하다. '쓸만한 가치 없음'은 당시의 사회를 기준으로 한다. 괴물과 맞서야 하니까 싸움이라는 기술은 쓸만한 가치가 있다. 의학적 기술도 마찬가지다. 병원은 쉽게 갈 수도 없고, 간다 하더라도 의사가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쓸모 있는 무력과 의학적 집단의 만남이 언제나 성공할까? 그렇지 않다. 전투에 특화된 군대나 약탈을 서슴지 않는 범죄자 집단이 의사를 강제로 데려가는 것은 생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끝난다. 상대를 해치는 것이 쓸모인 무력 집단과 상대를 치료하는 것이 쓸모인 의학적 집단은 애초에 목적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쓸모만으로 사회를 작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에 단기간의 협력이라면 효율이 높겠지만, 생존은 삶과 같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기적 효율보다는 장기적 효과 추구가 보다 적합하다. 따라서 사회가 다시금 일상을 되찾도록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의 기준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를 기준으로 '무쓸모'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현재와 극 중의 '무쓸모' 기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콘텐츠 창작의 과정에서 특성을 부각한 것도 있겠지만, 위의 예시는 유형만 놓고 본다면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을 사람이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권력은 남용되기 쉽고, 의사 선호를 넘어 전 국민이 의사 되는 것에 혈안인 현재다. 쓸모뿐 아니라 무쓸모의 사람 유형도 같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괴물화로 기능을 상실한 것과 같은 '무쓸모'의 기준을 통용한다고 생각한다.

ⓒ 스위트홈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위에서 배제되는 사람으로 나열했던 사람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배제된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는 빠르게 성장하도록 했지만, 효율만을 추구하도록 했다. 짧은 시간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장기간으로 보면 필패다. 힘을 가진 몇몇 직종만을 선호하는 반면, '돌봄 노동'과 같이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폄하하는 사회다. 최근 '최저 임금 차별 적용' 논의에서도 돌봄은 역시 포함되었다.


반면에 배제되는 사람은 대부분 약자다. 장애가 있거나, 고령이거나, 너무 어리다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하지만 괴물화로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조차도 이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감염으로 인한 질병이나, 괴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신체적 장애, 트라우마를 비롯한 각종 정신적 장애 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람은 누구나 어린이였고, 노인이 된다. 당장은 건강하고 돌봄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타인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시기는 빠르게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이들을 쉽게 포기하거나 포기에서 우선순위를 항상 높게 부여한다면, 사회는 지속될 수 없다. 혼자서 생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타인을 향한 돌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렇게라도 모두가 지속가능한 삶을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도 지속가능해질 수 있다. 현재처럼 효율만을 추구하며 무쓸모의 기준을 정의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어도 나를 위해서라도 타인을 돌본다면 말이다.


ⓒ 스위트홈 3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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