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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Feb 01. 2024

실제 경험보다 영상을 더 중시함

Ppaarami’s Diary(32)

11월 17일


  미리사에 다녀왔다. 2박 3일 동안의 여정이 206개의 사진과 동영상 파일로 남았다. 휴대폰 사진첩이 북새통이다. 돌고래의 점프와 핀고래의 숨쉬기, 눈부신 해변과 알록달록한 음식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낸다.


  다음 여행을 위해 카메라 저장 공간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카메라에 저장된 파일을 컴퓨터로 옮기기 위해 바탕화면에 ‘미리사’ 폴더를 만들었다. 카메라에 담겨있던 2박 3일의 기록이 케이블을 타고 컴퓨터로 흘러들어 갔다. 헌혈할 때 혈액이 관을 타고 혈액 튜브를 빵빵하게 채운던 장면이 떠올랐다. 폴더에 파일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들을 천천히 감상하고 싶어서 11시인데 퇴근이 하고 싶어 졌다.


  파일 전송이 끝나고서는 세부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사진과 동영상을 분류했다. ‘미리사 사진’ 폴더를 만들었다. 사진 하나를 이동시켰다. 그런데 상위 폴더인 ‘미리사’ 전체가 텅 비고 ‘해당 파일이 없다’는 문구가 떴다. 순간 가슴이 조여들고 등줄기에 전기가 흘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큰 사고를 쳤음을 인지한 전율‘이었다. '미리사에서의 2박 3일이 날아갔다'는 문구가 뇌리에 떴다. 그 문구를 제외한 모든 기억과 인지능력이 사라졌다. 마치 파일모양 아이콘만 덜렁 남아있는 텅 빈 폴더처럼.


  손을 떨며 마우스로 화면을 더듬거렸다. 왼쪽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다 '이동 취소'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성적 사고가 잠시 중단된 상태로 뭐에 홀린 것처럼 '이동 취소'를 눌렀다. 미리사 폴더가 다시 206개의 파일로 채워졌다. 2박 3일의 삶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기억을 회복했을 때 이런 심정일까.


  한동안은 불안이 가시지 않아 몇 번이나 미리사 폴더를 껐다 켜며 정말로 모든 파일들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진정을 하고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등골까지 서늘한 일이었나 싶었다. 좀 아쉬운 일이기는 해도 사진과 동영상이 사라졌다고 내 인생에서의 2박 3일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어째서 파일과 실제의 시간을 동일시했을까. 내 기억 속에 미리사에서의 일들이 생생하게 남아있고, 나는 그걸 글로 풀어낼 용의도 있고, 그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도 있는데. 언제부터 사진과 영상이 이 모든 것을 압도했나.


  그 며칠이 사라졌더라도 심장이 조여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일인가도 싶다. 함부로 흘려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주제에. 아마 그렇기 때문에 알차게 쓴 시간에 대한 집착이 생겼을 수는 있겠다만, 오늘의 전율은 나 자신에게 무안할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파일을 되찾았으니 할 수 있는 허세다. 파일을 영영 잃었다면 역시 나는 멍청이라고 자책하며 또 하루를 버렸겠지. 전율에 더해 단장의 아픔까지 끌어와서 앓았겠지. 나는 참으로 모를 인간이다. 나는 정말이지 나를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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