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aarami’s Diary(33)
11월 18일
세 시간이 넘도록 정전 상태가 계속됐다. 해가 아주 쨍쨍한 토요일 오전에 나는 주로 빨래를 하면서 컴퓨터로 글을 쓴다. 전기가 필요한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정전이 됐다. 정전은 자주 있는 일이라 놀라울 건 없다. 그런데 세 시간이 넘게 지속된 것은 처음이라 불안하고, 불편하다.
글쓰기에 정신이 팔려 세탁기가 멈춘 줄도 몰랐다. 세탁기가 멈추었다는 건 세탁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세탁이 끝났으면 꺼내서 널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므로 세탁기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세탁은 끝나지 않았다. 세탁이 끝나지 않았다면 응당 세탁기 문은 열리지 말아야 한다. 세탁기 안에 물이 가득 차있을 때는 더더욱.
그런데 스리랑카의 세탁기는 열렸고, 문을 열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문을 도로 닫았다. 미처 나오지 못한 물이 문에 부딪히며 쫓겨 들어갔다. 거실 바닥에 물이 찰랑거렸다. 젖은 발로 인조 나무가 깔린 마루 바닥을 걸어 다니며 세숫대야와 걸레를 챙겼다. 걷는 데마다 발자국이 찍혔다. 걸레로 물을 훔치고 대야에 걸레를 짜고 다시 물을 훔치기를 십수 번 반복했다. 그 사이에 가짜 나무 바닥은 수분을 머금고 들뜨기 시작했다. 임대 기간이 끝나고 집을 뺄 때 돈을 물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스리랑카의 건축 자재 값은 정말 비싸다고 들었다.)
몸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에어컨도 멈추었다. 창문을 열면 그나마 남아있는 냉기가 습하고 더운 바깥바람에 잡아먹힐 것이다. 찬물을 마셔서 식혀야겠다. 냉장고를 열었다. 내부가 어둡다. 냉장고라고 별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방울이 송송 맺힌 물병을 꺼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있는 거다. 움직이면 더우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러면 안 덥다고 엄마가 어릴 때 가르쳐 주었었다.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어찌나 쨍쨍한지 눈이 부시다. 선크림을 발라야 하나. 너무 조용해서 음악을 틀었다. 한 곡만 듣고 껐다. 정전이 아주 오래갈 수도 있으니 휴대폰 배터리를 아껴야 할 것 같았다. 밥이나 먹을까 싶지만 가스버너를 켜려면 전기가 필요한 구조다. 오늘따라 새도 울지 않는다. 조용한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노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이 안 잡힌다. 정전 4시간 차에 정신과 시간의 방을 떠올리게 됐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다행인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낮이라 덜 무섭다. 주말이라 다행이다. 일할 때 정전이 되면 더 불편할 테니까. 냉장고에 딱히 음식이 없어서 다행이다. 사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밤이면 덜 더웠을 텐데. 평일이었으면 이 시간에 빨래를 하지 않았을 테고 마루 바닥이 망가지지도 않았을 텐데. 냉장고에 있는 유제품과 계란은 괜찮을까.
스리랑카에 오기 전에 정전과 단수를 자주 겪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각오한 일이다. 그러나 각오를 하는 것과 실제로 그 상황을 겪는 건 다른 일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전기가 없으면 현대인은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불안과 더위에 지쳐서 집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집만의 문제구나 싶어 애가 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만 문제가 있는 거라며 며칠 동안 전기 없이 살아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전체의 문제라면 빨리 해결되겠지만, 나만의 문제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휴대폰을 중전 할 수 없는 건 큰 문제다.
아파트의 경비원에게 상황을 말했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나는 싱할라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 아쉬운 사람은 나이므로 싱할라어로 대화를 했다. 어찌어찌 건물 전체가 정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안심이 됐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근처 세탁소를 가니 주인장이 부채질을 하며 나를 맞이했다. 침대시트를 맡기면서 왜 정전이 된 건지 물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고 온 동네가 정전 상태이며 오후 5시 반까지 정전일 거라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세탁소 옆 식료품 가게에서 바나나를 사면서 왜 정전이 된 건지를 물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일도 하루종일 전기를 쓸 수 없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가게 옆의 식당 겸 카페로 갔다. 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앗! 그런데 카페는 시원했다. 에어컨이 정상가동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평소와 다름없이 판매하고 있었다. 자체 발전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냅다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땀을 식혔다. 몸에서 열기가 좀 가시자 허기가 졌다. 음식을 주문하고 집에 들러서 휴대폰 충전기를 가지고 왔다. 남은 배터리량이 36%뿐이었다.
고수가 잔뜩 들어간 태국식 크랩카레라이스가 내 테이블에 놓였다. 나는 천천히 카레 속에서 숨 죽어있는 고수 잎을 하나씩 골라내기 시작했다. 볶음밥 속에 박혀있는 파인애플도.
그리고 포크로 밥알을 약 150알 정도 떠서 입에 넣고 한 입에 오십 번씩 씹었다. 이미 다 넘겨서 더 이상 씹을 게 없어도 씹었다. 나는 오랫동안 먹어야 한다. 여기는 그릇이 비면 묻지도 않고 전부 치우고 테이블을 닦아버린다. 정리가 다 된 테이블에서 버티고 앉아있기란 웬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고서야 쉽지가 않다.
이 근방에서 비싸기로 악명 높은 이 카페에서 음식을 계속 주문할 수도 없고, 아직 4시간이나 정전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니 맛을 음미한고 음미하고 또 음미하리라.
여기서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충전이다. 5시 반까지 버티려면 휴대폰배터리가 충분해야 한다. 휴대폰을 100% 충전하고 보조배터리까지 완충하려면 두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두 시간 후면 하루 중 가장 덥다는 2시다. 그러니 최소한 이 카페에서 3시간을 버텨야 한다. 밥 한 끼를 세 시간 동안 먹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도전이다.
남부럽지 않게 밥을 천천히 먹는 나이지만 세 시간 동안 먹어본 적은 없다. 이건 위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문제다. 삼십 분쯤 먹으면 뭘 얼마나 먹었는지 상관없이 뇌는 배불러한다. 그리고 먹던 음식에 질린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적당히 활용했다. 짭짤한 카레밥을 먹다가 질리면 다 녹아빠진 아이스크림을 후루룩 한 입 마셔서 뇌에 단거 사인을 보내고 뇌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다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전기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위험하구나. 이렇게 고군분투하다가 슬픔으로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내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정전 피해자들이 있었다. 휴대폰을 보면서, 심지어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업하면서 아주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정전 때문에 온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다. 눈치를 덜 볼 것이다. 당당하게 충전을 하고 시원함을 누릴 것이다.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또한 처지는 다르더라도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는 사람들,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힘은 공감이다. 그래서 '야너두' 광고가 히트한 것이다.
실은 카페 직원들은 모두 나에게 친절하고 나는 이곳의 단골이다.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오며 가며 여기서 시나몬롤과 아아를 사 먹곤 했다. 일주일 전에도 천둥번개 때문에 카페에 한 시간쯤 갇혀있었다. 직원들은 인근에서 발전기 공사를 하느라 정전이 됐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한 시간 만에 식사를 중단했다(사실 거의 다 먹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은 먹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배가 불러서 잠이 온다. 아오, 정전은 정말 위험하고 슬픈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