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느 하루는 마지막 날이겠지.
11월 26일
2006년에 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했다. 그때의 나는 피아노 연주와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우연히 ARTE TV에서 피아니스트 랑랑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반한 지 3년쯤 됐을 때다. 그의 연주 소리와 연주할 때의 표정, 몸짓에 매혹됐었다. 그가 연주하는 작품과 작곡가에까지 관심이 갔다. 아, 이 곡이 모차르트의 것이로구나, 모차르트 알지 알지. 그때부터 모차르트의 곡을 즐겨 들었다.
그러므로 유럽 여행에서 오스트리아는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고 활동한 나라이니까.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빼꼼히 노란색 외벽이 보였다. 눈에 띄는 색깔이 아니더라도 모차르트의 생가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집 안에는 어린 모차르트가 연주했을 작은 피아노와 낡은 노트들이 있었다. 주변 상가들의 출입문을 장식한 아기자기한 간판과 어느 가게에서나 살 수 있었던 모차르트 초콜릿도 기억에 남아있다.
2006년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떠들썩하게 많은 행사가 이어졌다. 배낭 여행자 주제에 나는 가방 안에 정장 구두 한 켤레와 재킷 하나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음악회나 인형극을 보러 갈 때 나름대로 차려입었다. 그게 나의 낭만이었다. 공연 티켓을 게스트 하우스 침대 위에 올려놓고 옷을 갈이 입으면서 설렜고, 극장 로비에서 사람들과 섞여있는 것도 즐거웠다. 그래서 300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잘츠부르크에 오겠다고 결심을 했다. 50년 후에 이행할 버킷리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이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이 시절의 낭만을 기억할 것. 그리고 건강할 것.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할 것. 20대 내내 운동을 했다. 수영을 하고 태권도를 하고 킥복싱을 하고, 헬스장에 가서 PT, 요가, 스피닝 등등도 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챙기는 기특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50년 후를 내다보는 사람에게 하루하루는 너무 짧았고, 짧은 하루는 점점 하찮아 보였다. 30대가 되면서 시작된 하드한 사회생활에 치여 낭만은 사라졌다.
30대에 새로 적은 버킷리스트는 '십 년 후에는 집을 살 것(집 값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 때다)', '10년 후에는 이직을 할 것(이놈의 회사 꼭 때려치워야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로또를 샀다. 연금 복권과 스피또도 샀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회사의 단점이 무엇인지를 설파함으로써 나 자신에게 퇴사라는 목표를 각인했다(친구야, 미안해!). 점집에 다니기도 했다. 이 시절의 나는 자주 아프고 우울했다. 과거의 결심이나 계획은 나를 떠받쳐주지 못했다. 나의 현재를 만들어 주지도 않았다. 과거의 계획과는 달리 지금 나는 한국을 떠나 스리랑카에서 월세 살이를 하고 있고, 이직이 아니라 퇴직을 했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고, 하루 앞 날도 알 수 없다는 그 흔한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됐다.
더 이상 10년 후, 50년 후에 할 일들의 목록에 설레지 않는다. 물론 2056년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모차르트 생가를 다시 방문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생가가 소행성 충돌로 파괴될지, 내가 그전에 지구에서 사라질지.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일 뿐이다. 미래는 내 것이 아니다. 상상일 뿐이다. 내 것은 오로지 오늘뿐이다. 주어진 하루만이 내 것이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소중하다. 그것이 내 전부이다. 절대적인 나의 세상이며 유일한 가치다. 오늘만이 내 세상. 요즘 나는 이 말에 설렌다.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한때 나는 50년짜리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호기로운 인간이었다. 50년 후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공격적인 인생 계획을 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열쇠라고 생각했었다. 젊은 날의 패기와 어리숙함이었는지, 당시에는 그게 내가 세상을 버텨낼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사는 방법은 그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살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루씩 살다 보면 언젠가의 하루는 마지막 날이겠지. 그날도 평온하고 고요할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