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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엄마 Feb 22. 2023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식재료

“헉!”

외마디와 함께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바로 닫아버렸다. 짧은 몇 초 동안 열어본 냉장실을 오늘 안에 정리하기란 끈기가 부족한 나에게는 힘든 냉장실 모습이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냉장고 정리였기에 긴 날숨과 함께 

무거운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본다. 

“휴... 맙소사! 그동안 냉장고가 아니라 음식 보관창고로 썼었네.”

불량 주부로서의 반성은 빠르게 인정하고 방학 중인 아이들이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불필요해 보이는 반찬과 식재료를 찾아본다. 

“이거 못 먹을 것 같은데.”

“아, 이것도.” 

“이건 언제 산 거지?”

하나둘 빼내던 반찬통은 어느새 싱크대 위에 켜켜이 쌓이기 시작한다. 냉장고 정리를 한 번에 다 할 수 없으니 오늘은 냉장실 세 칸만 정리하자며 정리를 포기할 수도 있는 나에게 협상을 해본다. 

“일단, 빼자.”

다 빼고 다시 필요한 것부터 반찬통에 넣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럴 땐 과감한 성격인 또 다른 자아를 만나게 된다. 반창통과 식재료를 쓱쓱 빼고 개수대에 음식물을 따로 버리고 통은 설거지통으로 보내는 반복 작업을 하니 버려야 할 음식이 아닌 음식쓰레기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각자 방에 있는 아이들이 주방에 올까 봐 빠르게 물로 한 번 비워내고 음식물이 담긴 통을 베란다로 옮겨본다. 


먹을 수 있는 반찬은 찬장에서 꺼낸 새 반찬통에 넣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깨끗한 새 행주를 꺼내 냉장고 안을 깨끗이 닦아본다. 처음 냉장고 문을 열었던 그 기분과 달리 깨끗하게 비워진 냉장실 안이 마치 미루어두었던 숙제를 해낸 뿌듯한 내 마음을 닦는 것만 같았다. ‘뽀득뽀득’ 얼룩진 곳을 여러 번 닦아내니 새 냉장고를 샀던 그날처럼 냉장고 안이 깨끗하고 환해진다. 냉장고 안 조명까지 더 밝아 보이고 냉장고 안에 들어갈 음식이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정리된 반찬통을 다시 넣어본다. 이건 자주 먹는 반찬이니깐 손이 잘 닿는 위치에 넣고 된장, 고추장은 어쩌다 한 번씩 꺼내는 거니 이건 위에 올려놓고 누구든 쉽게 꺼낼 수 있는 위치에 정리하니 우리 집 맞춤 냉장고로 서서히 바뀌는 순간들이 즐거워진다.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냉장실 정리도 설거지도 마무리가 되었다. 

어깨는 무거워졌지만 정리된 냉장고를 여는 순간 처음 열었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자리를

 찾은 반찬통과 여유로운 냉장실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도 여유로움이 생겼다.




‘이 맛에 정리하는구나.’ 


어깨가 무거워질 만큼 평소에 안 하던 정리를 마친 냉장고는 정리하기 귀찮은 나를 정리 후 찾아오는 행복감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토록 궁금했던 우리 집 식재료 파악이 가능해졌다. 밑반찬을 보니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지 계획도 하게 되고 한눈에 보이는 식재료를 보며 내가 가진 창의력을 발휘해 어떤 메뉴를 만들지 생각도 해보게 된다.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식재료’ 덕분에 어떤 요리를 할지 오늘 창의력을 발휘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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