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ark Mar 17. 2022

능력주의 (Meritocracy)

개천에서 정말 용이 날까?

내가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까마득한 2000년대 중후반), 미디어에 심심찮게 나오던 콘텐츠 중에 하나는 교과서와 학교 수업만으로 명문대를 간 학생들의 이야기였다. 거의 매년 그런 류의 콘텐츠를 보았던 것 같은데, 그와 같이 매번 딸려오던 이야기는, 그들의 집안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또 그렇기에 노력만 한다면,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마무리가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개천에서 용이 날까?  용이 나올 확률은 어느 정도 일까?


Photo by Katrin Hauf on Unsplash

그전에 이글의 핵심인 능력주의의 뜻부터 살펴보자. 한글로 번역된 능력주의의 뜻을 보면 대게 내가 성취한 성공의 비결이 능력/노력이라고 말하는 것 정도로만 나오지만, 그렇게 와닿지를 않는다. 영어 뜻의 Meritocracy를 파헤쳐보면, 정해진 클래스에 따라 부나 권력이 계층이동을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성공은 능력이나 노력 이전에 운이 좋았다고 하는 것이 Meritocracy, 능력주의인 것이다. 한국 정서에 빗대어 보면 돈이 돈을 만들고, 금수저가 금수저를 낳는다고 표현하면 쉬울 것 같다.


그렇기에 능력주의와 항상 같이 나오는 것이 엘리트 계층이다. 그들의 재정 상태는 대부분 탄탄하기에, 그들의 자녀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에 입학을 해서 좋은 직업을 갖는, 엘리트 계급의 계층 이동이 핵심 포인트이다. 또, 그러한 관점으로 보면 성공을 '당해버린'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 자신의 성공의 비결은 '노력'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능력주의가 꼬집는 이 세상의 오류이다. 그로 인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감에 빠지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더욱더 우월감에 (그들은 순수 자신들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기 때문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개천에서 용이 난 케이스를 왕왕 알고 있다. 심지어 거의 매년 저런 케이스를 본 기억이 있기에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것은 미디어가 주는 확률적 오류의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이러한 케이스들은 티브이에 나올 만큼 희박한 확률로 이뤄낸 사람들이기에 티브이에 나온 것이다 (비슷한 예로 뉴스에서 비행기 사고를 한 두 번 접하고, 세상에 비행기 사고가 엄청 많다고 믿는 것과 같다). 하지만, 소위 강남 8 학군의 사(변호사, 의사, 검사 등) 자 직업 부모의 강남 키드들이 이뤄낸(?) 명문대 합격 스토리는 내 기억에 보거나 들은 기억이 없다. 당연히 그만큼 티브이에 나올 만큼 희귀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어느 정도의 확률로 가능했던 것이 내 또래의 세대에는 더욱 힘들어졌고, 나의 세대보다는 지금 자라나는 세대가 훨씬 힘들 것이다. 개천은 그냥 개천이고, 용은 용이 나는 곳에서 나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작점이 공평한지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점을 던져야 하고, 그러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과정의 공정은 꽤나 무거운 주제이기에, 다음에 다뤄볼 기회가 있으면 다뤄보겠다.


Photo by Tingey Injury Law Firm on Unsplash


그렇다고 내가 이제 와서 모든 능력주의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아직도 개천에서 용은 나고 있고, 그 바탕에는 노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내가 보고 들으며 자라온 환경에 빗대어 보았을 때, 절대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 믿음마저 부정당한다면, 세상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이 되는데, 그런 세상의 인생은 너무 무의미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부터 다르게 시작하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경험해왔다. 놀기만 하는 것 같은데 항상 시험 성적이 좋은 친구, 그 누구보다 노래를 잘하는 친구, 미술 한 번 배워본 적 없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 혹은 외적으로 키 크고 잘생긴 친구. 심지어 정말 가끔 이 모든 것들을 다 잘하는 사기캐까지.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가 저 친구보다 무언가가 낫다고 한들, 나보다 그것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러므로 내가 능력주의를 건강하게 해석하는 방법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1년 전보다 나은 사람인가? 지금의 당신은 1달 전보다 나은 사람인가? 혹은 전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은 무엇인가? 아니, 그러한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가? 어떠한 외부 요인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건, 금수저 출신이 아니건 상관없다.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저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면 된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는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본인만의 기준에 달려있다.

작가의 이전글 평등과 공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