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글을 써보려 하다가 꽉 막히고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애써 잘 정돈해 놓았다가도 한동안 신경 쓰지 못하면 쉬이 무질서해진다. 내가 쓰는 언어의 규칙은 때마다 일관성을 잃고, 사유들은 정합성을 잃는다.
글로 쓸 자신이 없을 때 도식화를 해보는 건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파워포인트를 여는 순간 회사 일을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됐건 유쾌하지는 않다.
저 한 장에 존재론과 인식론의 철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물리학을 다 담아보려는 나의 욕심에 웃음이 난다. 나는 뭔가 대단한 걸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면 이것저것에 같다 붙여도 다 통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흥분에 남이 듣기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올봄에는 유독 많이 읽고 관찰했다. 인식의 범위를 내 주변에서 우주로 넓혀 보기도 하면서, 인간도 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떤 힘들이 나를 밀어주면 나는 구른다. 자유로운 상태라는 건 이끼 낀 돌이 아니라, 구르는 돌이다. 구르는 돌을 보고 "노력이 가상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 주도적, 능동적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남을 위한 충고라는 것도 "이런저런 걸 시도해봐.", "네가 살아있음을 느껴봐." 같은 것들이 었는데, 아무리 이쁘게 말해도 상대의 죄책감이나 일깨워 주는 듣기 싫은 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기 주도적, 능동적이라는 것은 좁은 인식에서 발생한다. 내 선택의 원인들을 알지 못하면 못할수록 '자유의지'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동이 수동적이라는 것도 동의하지 않는다. 수동이라는 말은 행동의 명확한 원인을 특정할 수 있을 때 적합한 단어이다. 의지의 원인들은 삶 전체, 138억 년 우주에 산재한다.
한동안 내가 박힌 돌이 되어서야 알았다. 의지라는 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외부의 사건들과 마주침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돌의 무게와 깊숙한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갑자기 굴러온 돌에 의도치 않게 세게 부딪친다거나, 강물이 서서히 밀려와 아래의 진흙을 쓸어간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대부분의 충고는 돌을 빼줄 만큼의 힘을 가지지 못한다. 충고가 값지게 들렸다면 그건 그냥 때가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다시 구르고 있다.
누가 보면 '쟤 요즘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스스로의노력이라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애써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곧 나의 노력하지 않음을 단죄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구르는 힘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얼마 못 가서는 다시 멈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다 넓은 인식을 얻었다. 나는 이제 다시 박힌 돌이 되어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