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폭풍이 되어 온 너는
나의 슬픔들을 날리고 격정들로 채웠어.
오랫동안 피해자로 살았었다며 이제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너의 다짐은
누군가의 목적어로 살지 않겠다는
강건한 문체의 선언문 같았지.
그것은 곧 내 역할도 정해 버릴 것 같았어.
뜬금없이 "나는 너 안 기다릴 거 같아."
라고 내가 말해 버렸을 때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어.
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며칠 동안 생각했었어.
'이번 관계는 내가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일종의 '인정' 같은 거였더라.
먼저 말을 걸어주고, 만나자고 하고,
만져달라고 할 때는 쉬웠지.
그런 요구들이 사라지면 참 어려워.
네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모두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읽지 못한다면 용기 내서 물어봐야지.
그런데 그게 망설여지는 이유는
그 용기가 그저 강박에서 발생한
참을성 없는 가벼움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겠지.
기다림을 못 참는다는 건
상대의 자유를 딱 그만큼만
인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폭풍이 잔잔해질 때쯤에
나는 네가 나를 목적어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
다행히 네가 가져온 삶의 담론들에
몰입하느라 우울이 자주 느껴지지는 않았어.
인간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뭘 해줬냐는 것에 있다더라.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들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오랫동안 여럿에게 옮겨가겠지.
기약 없이 만나 그날 하루 기쁨인
사이도 나는 좋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혼자 달려온 이 감정은 둔감해져야지.
오늘이든 내일이든
몇 달이나 몇 년이 지나서든
네가 와준다면 기쁨일 거야.
왜냐면 너는 예의상 오지는 않을 것 같거든.
그렇다면 내가 기다리는 것은 아마
그날 서로가 나눌 자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