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근거림은 파도가 되어, 그의 해변에 닿습니다. 그의 반응을 살피려 나름 애써 보지만 그저 한없이 기다리는 기분만 들어요. 나에게 있어 상대는 무한의 세계입니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자 그가 해변에 쌓아놓은 모래성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의 파도에 의해 그의 성벽이 조금씩 부서져 간다는 것도 알아차렸죠. 파도가 높아지고 간격이 잦아지자 성벽은 찰나에 무너집니다. 파도는 그 이전부터 꾸준히 상대에 닿고 있었지만, 그것을 '찰나'로만 인식하는 것은 단지 당하는 사람의 입장인 것이죠. 갑자기 찾아온 감정에 상대는 어리둥절해합니다.
이번에는 그의 파도가 나의 해변에 닿습니다. 서로는 연애가 시작되었음을 대화로 확실히 해둡니다. 서로의 해변에는 상대가 남긴 주름들이 늘어갑니다. 나의 파도가 그의 모래를 쓸어 나의 해변에 퇴적시키자 어느새 그는 나의 지층이 됩니다. 그의 파도 역시 나의 해변을 깎아내어 자신을 이룹니다.
연애는 두 사람의 선언으로 시작해서, 어느 한 사람의 선언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끝나지 않았죠. 연애는 둘이서 하는 것이지만, 사랑은 혼자서도 하는 것이니까요. 연애가 표면적인 두 사람의 관계라면, 사랑은 내밀한 한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두근거림이 파도가 되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마음의 일렁임이 멈추었다면 사랑은 종료된 것이겠죠. 상대의 해변에 주름 하나 남길 수 없을 만큼 상대가 달아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멸된 것을 추억하지 않아요. 추억은 소멸을 전제로 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 추억되지 않을 때야 비로소 사랑은 종료된 것입니다.
후속될 사랑이 찾아오지 않은 경우라면, 이전의 사랑을 끝내기란 어렵죠. 상대가 나의 해변에 남긴 주름은 다른 상대의 파도에 의해 더 쉽게 지워져 나가니까요.
이제 남은 건 그의 것인지도 잊은 채, 나를 이루고 있는 지층뿐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타자를 한없이 궁금하게 하여 타인과의 차이를 감내할 힘을 부여합니다. 사랑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가꾸어가다가, 어느덧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