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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두진 Apr 19. 2021

집 이야기, 이사 이야기

지금 우리 동네는 남산

(*인터뷰이의 동의하에 실명을 공개하고 내용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숫자는 살았던 집의 순서입니다.)


1. 나 김종신은 기억도 나지 않는 제주도 동문시장 근처 해짓골 단칸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 월정리 출신으로 윗 세대 어른들이 경성제대, 와세다대학 등을 나오는 등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본인도 서울에서 중앙중고등학교를 나오고 한양대 정외과에 입학했지만, 그만 집안 어른으로 인한 연좌제에 걸렸다. ‘뭘 해도 안되겠다' 싶어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병역을 마치고 다시 제주에 돌아와 사촌 누나가 운영하던 횟집에서 일했는데, 쌀도매상 집 딸 ‘초절정 미녀'가 수금하러 올 때면 일부러 영어책을 읽었다. 처갓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후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소금, 수박 등을 팔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했다. 형이,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2. 아버지는 배를 구해 선주가 되어 어업을 시작했고 건입동으로 이사했다. 기억나는 첫 번째 집이다. 한 지붕 세 가족처럼 여러 가족이 마당을 공유하는 집이었다. 옆집 여자애가 내 세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걸 보고 달려가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이마를 크게 꿰맸다. 


3. 그 사이 제주도에도 분당 같은 곳, 즉 신제주가 생겨 그리로 이사를 갔다. 신도시 중심에 제원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초등학교는 물론, 반포아파트 같은 2층 상가에 어린이집, 서예학원, 피아노학원 등이 있었다. 그 전에 아버지는 당시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제주 시내 칼 호텔에서 낚시점을 하셨는데, 한일관계가 나빠지면서 주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던 사업이 어려워졌다. 그 때 이 제원아파트를 지은 건설사 대표가 낚시점과 아파트를 바꾸자고 해서 이사가게 된 것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선망하던 이 아파트는 지금도 있다. 집안이었는지 복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뚜껑을 열고 쓰레기를 버리면 바닥까지 떨어지는 시설이 있었다. (*’더스트 슈트'라는 것이다. 쓰레기 봉투가 터지는 등 위생문제가 심각하여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실수로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져 반지를 찾아줬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제주 출신이지만 유년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지방 소도시의 아파트촌에 대한 것이다. 


4. 제주 엠비씨 근처, 당시로서는 한적한 지역의  중앙중학교로 진학하면서 3층짜리 빌라를 새로 지어 이사갔다. 아버지가 음료수 등을 사들고 현장에 자주 가셨는데 지금도 어머니에 의하면 아버지가 그런 일을 잘하신다고. 당시 아버지는 꾸준한 일본어 공부의 덕분으로 여행사를 하고 계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석재공장의 월급 사장이 되셨다. 각 그랜져를 타셨는데 그 차가 참 좋아보였다. 이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5. 그 때부터 기타 치고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아주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수학을 많이 해야하는지 몰랐다. 음악, 영화 동아리를 하며 맨날 밖으로만 돌았다. 처음엔 기숙사에 있었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집에 이야기해서 잠실 운동장 주경기장 부근의 아파트로 옮겼다. 재일교포였던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 한국으로 시집와서 살고 있던 집이었다. 6개월 후에 의경으로 군목부를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가 제주시 외곽에서 조그만 카페를 하고 게셨는데 거기에 경찰 손님들이 종종 왔었고 그 분들이 아들을 의경 보내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6. 군대를 다녀온 후 다시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경영학이 워낙 재미 없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오셨다. 사실 음악이나 영화를 하고 싶지만 음악은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렵겠고 영화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본인이 한양대를 중퇴한 경험이 있어서 그러셨는지 아버지는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셨다. 


7. 일단 큰 결심을 하고 휴학했다. 어머니 사촌 동생이 살던 명륜동 성대 뒤 명륜 시장에서도 골목길로 꼬불꼬불 올라가는 곳의 빌라로 들어갔다. 삼성동 가는 63-1번 버스 종점이었다. 이 집에서 살면서 혼자 단편 영화도 만들고 남들은 연인과 은밀한 시간을 보내러가는 비디오방에 틀어박혀 켄 로취나 폴란드, 러시아의 예술 영화 감독들 영화를 실컷 봤다. 그러다가 연줄이 닿아서 영화 ‘주노명 베이커리’의 연출부 막내로 1년 동안 지냈다. 조감독이 계약해서 돈을 받으면 스탭들에게 나눠주는 식이었는데 연봉이 200만원 남짓했다. 그나마 돈 쓸 시간도 없었다. 집주인인 어머니 사촌 동생을 이모라고 불렀는데 은행에 다니던 이모부가 좋은 분이었다. 두 분 덕분에 연출부 생활을 잘 마쳤다. 


8. 졸업을 하기 위해 다시 수원으로 갔다. 반지하에서 살았는데 역시 주인이 좋았다. 거기서 재미있게 단편 영화도 찍고 졸업은 겨우겨우 억지로 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연출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스크립터로 일하던 중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정다운을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1975년 생 동갑이다. 그러다가 ‘6개월 시간만 나면 멋진 시나리오를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한예종 대학원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면접관이 ‘영원한 제국' 감독하신 분이었는데 ‘뭘 잘하는지 잘난 척 해 봐라, 우리가 왜 너를 뽑아야 하냐.'고 물어서 ‘저는 영화를 좋아하고…’ 숫기 없이 대답했더니 탈락이었다. 

그러다가 유학의 꿈을 갖게 되었다. 친한 동아리 선배가 백두산, 올드보이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임준형 작가인데, 영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영국은 계급이 있는데 서로 존중하고 그게 좋다, 오케스트라 공연 보러 다니는 사람들과 펍에서 축구 보는 사람들이 서로 인정해준다, 자세히 보니 높은 지위일수록 일을 열심히 하고 서민들은 그냥 적당히 재미나고 편하게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 영국에 가자, 거기서 시나리오 쓰자고 결심했다. 


9. 일단 영국으로 갔다. 서리의 길포드라는 곳에 있었는데 에릭 클랩턴의 고향이다. 정다운은 런던에 있고 혼자 홈스테이 하숙을 했는데 흡연자이다 보니 등급이 높은 곳으로는 못 갔지만 나름 좋았다. 거동이 불편하여 짜증이 있던 집주인 노부부와 가끔 언쟁이 있던 정도.   

 

10. 원래는 둘이 시간차로 공부를 하려 했다. 학생의 배우자는 풀타입 취업이 가능한 비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학생은 취업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둘이 동시에 합격을 했다. 정다운은 캠브리지 대학으로 김종신은 런던대학교의 골드스미스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예술 분야의 세계적 명문임.) 여기서 약간의 사업가 기질을 발휘했다. 지금은 신개발지로 유명한 카나리워프라는 곳의 오래된 아파트 한 채를 빌려서 재임대를 놓았다. 우리로 치면 여의도의 오래된 아파트 정도인 것 같다. 집주인은 파키스탄 아니면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다. 캠브리지의 기숙사에 살던 정다운이 주말에는 런던으로 왔기 때문에 거실은 우리 부부가 사용하고 나머지 방 세 개를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세주었다. 즉 쌀 문화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 되었다. 

아파트는 낡았어도 동네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그로 인한 에피소드도 있다. 스타벅스에서 2년 동안 알바를 했는데 카나리워프에 산다고 하니 알바 동료인 스웨덴 친구가 ‘니가?’라며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은 그 변두리'라고 상황을 설명하니 알겠다는 표정으로, 집에서 카레 냄새 안 나냐고 믈어왔다. 김치찌개 끓여먹는 입장에서 그런 게 대수일리 없었다. 그 대신 대마초 냄새는 정말 많이 났다. 

11. 보통 대학원 다니면서 단편 영화를 두 편 정도 찍게 되는데,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서 열심히도 했고 운도 좋아서 무려 네 편을 찍었다. 무려 수석으로 졸업을 했는데(!) 문제는 이사였다. 영국은 크리스마스에 모든 것이 정지하는데 그 때 이사를 가겠다고 하니 한 달 전에 방을 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살 곳을 구하다가 엉뚱하게도 아프리카에 가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집을 구해주는 lastminute.com이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고 대강 여기로 가라 하면 가야하는 그런 사이트인데 덕분에 모로코에서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 

라스 팔마스에서 가까운 아가디르라는 곳이었다, 좀 지내다 보니 국물있는 음식이 그리웠는데, 한식은 생각도 못했고 중식이나 일식집이 있을까 하여 안내를 받아 가보니 복잡한 골목의 깜깜한 2층 겁나는 곳에 무려 ‘서울식당'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원양 어선들이 많이 기항해서 한국인 상대로 장사하는 집이 있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거기서 김찌 찌게, 된장 찌게에 문어까지 잘 먹었다. 한 달 있는 동안 마라케쉬도 다녀왔다. 


12.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캠브리지에 가서 마치 호그와트 학교 같은 졸업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태국에 가기로 하여 치앙마이에서 한 달 정도 살다가 돌아왔다.


13. 제주도 부모님댁 근처에서 원룸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정다운으로서는 처음으로 며느리로서의 경험을 한 시기다. 운전면허도 따고 한국에서 살 준비를 하는데 유학 시절의 온갖 후유증이 물려오면서 둘이서 한참 동안 병치레도 했다.


14.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정다운은 세 자매의 맏인데 동생들이 세상 물정을 잘 알고 똘똘하다. 그 중 둘째가 명동에서 ‘명동 도시락’이라는 가게를 하며 남산 기슭의 작은 집을 경매로 인수했고, 당시 벌이도 없던 두 사람에게 그 집 2층을 저렴하게 세주었다. 


15. 여기서 첫 애를 낳고는 잠시 평창동에 가서 살았다. 아이를 부암 숲 어린이집에 보내며 백사실에서 뛰어 놀게 했다. 


16.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다시 남산 그 집으로 돌아갔다. 처제네가 용인으로 떠나며 대출을 얻고 그 집을 인수하게 되었다. 무려(!) 3층 건물인데 1층이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영화사 기린그림의 작업실이고 집이 2, 3층이다. 3층이 이를테면 나의 공간으로 여기서 밤이면 기타를 치곤 한다. 영화는 직업이 되었고 음악은 여전히 삶의 동반자다.   

(촬영: 황두진)

이 글의 주인공은 47년의 삶 동안 16번째의 집에서 살고 있으니 평균 3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닌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짐을 풀자마자 다시 싸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이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는 롤랑 바르트 같은, 집에 대해 뭔가 심도있는 이야기를 내심 기대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 결국 집에 산 이야기보다는 이사 다닌 이야기를 더 듣게 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부동산 광풍 속에서 ‘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 대한 심오한 생각이 마치 집 이야기의 핵심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일종의 희망사항 같은 것이고, 오히려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서 집이란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이사다니며 사는 현실적 선택 같은 것에 가까운 듯 하다. (그러면서 돈도 벌어주어야 한다.) 건축가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글쓰는 입장에서는 이사 다닌 이야기도 집 이야기만큼 재미있다는 것을 계속 깨닫고 있다. 그래서 당분간 계속 해 볼 생각이다. 집이건 뭐건 사람 사는 이야기만한 것이 없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른다. 그래서 재미있다. 어쩌면, ‘집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니다'일수도 있겠다. 역시 내 안의 건축가는 풀이 죽겠지만, 내 안의 작가는 여전히 즐거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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