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서촌
(*인터뷰이의 동의하에 실명을 공개하고 내용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재준은 서촌 사람이다. 서촌에서 태어나 결혼 직후를 제외하고는 이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집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사 다니는 이야기가 되곤 하는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 비해 매우 특이한 경우다. 2021년 5월 14일, 그가 운영하는 엘피 바 'Old & Wise'에 앉아 진을 더블로 한 잔 받아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965년 자하문로 서쪽에 있던 김옥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의 엘피 바에서 불과 몇 십 미터 거리다. 당시 집주소는 옥인동 41번지. 지금 지도에서 찾아보면 필운대로 서쪽에 작은 필지로 남아 있다. 원래는 40평 정도 되는 땅이었지만 필운대로가 생기면서 잘려나가 13평만 남았다. 필운대로의 연혁은 인터넷에서 아무리 검색을 해도 알기 어려웠는데, 그의 기억에 의하면 1993년에서 1994년 사이에 뚫린 길이다. 그의 아버지가 1992년에 종로구 구의원이 되면서 이 사업을 추진하셨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고. (그런데 하필 본인 집이 잘렸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이었는데 한옥이었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이 집에서 살다가 아주 어렸을 때 한옥으로 이사갔고 중고등학교 이후에는 적산가옥에 살았다. 누상동, 신교동 등이었는데 법정동이 아닌 행정동으로 치면 결국 효자동 안에서만 움직였던 셈이다. 학교는 이 동네 남자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청운초등학교-청운중학교-경복고등학교 3단 콤보를 거쳤다. 대학 무렵 지금 살고 있는 옥인동 집으로 이사간 이후, 1990년대 초 신혼 무렵 잠시 일산 주엽역 근처에 살았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30년 넘게 계속 이 집에서 살고 있다. 빌라 형태의 집인데 아래층에는 인왕부동산의 대표인 아버지가 사신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살았던 집의 전부다.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이 동네에서 워낙 오래 살아 집보다는 동네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우선 종로보건소. 원래 그 자리에는 서울시립병원이 있었다.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는 '죽은 미이라가 돌아다닌다'는 전설이 있던 곳이다. 원래 누구나어린 시절에는 이런 공포의 장소가 하나씩 꼭 있게 마련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옥인동 46번지의 대지 5천 8백여 평에 시립 중부병원이 있었다. 1911년에 이 자리에 설립된 순화병원이 1959년에 개명된 결과다. 1976년 11월에 매각되었는데, 이재준이 12살이었을 때였다. 넓었던 병원 터의 상당 부분은 군인 아파트가 되었고, 그 한 쪽에 지금의 종로 보건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재준은 엉커크에 대한 기억도 갖고 있다. 엉커크(UNCURK)란 유엔한국통일부흥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준말인데, 인왕산 기슭의 웅장한 서구식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엉커크는 1954년부터 이 건물을 사용했는데 1966년에 화재가 났다 이후 1973년에 도로정비사업으로 완전히 철거되었다. 서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건물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바로 대표적 친일파의 하나인 윤덕영의 대저택이었던 벽수산장이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설계도로 지었다는 이 집은 당연히 당대의 화제였는데, 다행히 1956년, 즉 엉커크로 사용되기 시작한지 2년 정도 되던 무렵에 발표된 영화 <서울의 휴일>에서 근사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재준은 엉커크를 건물이라기보다 지형으로 기억하고 있다. 올라가는 길이 가팔라서 약 30미터 정도 미끄럼틀처럼 쓸 수 있었고 겨울이면 훌륭한 눈썰매장이 되었다. 한편 이곳은 동네 어른들이 개를 잡아먹던 곳이기도 했다. Y자 형태의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거기에 개의 목을 걸고... 동네에서 개가 없어지면 이곳으로 잡혀왔을 것이 뻔했다.
이재준의 기억은 사직공원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조선 왕조 당시의 사직단 상태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근대 이후 서울시민들에게 있어서 사직공원은 문자 그대로 공원이었고 놀러가는 곳이었다. 이재준은 이곳에서 바닥이 파란 수영장을 처음 보았다. 공기총 사격장도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면 과녁이 다가왔고 거기에 표적지를 끼운 후 다시 손잡이를 반대로 돌려 자기 위치로 놓은 후 총을 쏘았다. 대체로 유원지 같은 분위기여서 망개떡 같은 것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재준의 아버지가 잘 사주지 않아 여전히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사직단이 공원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의 일이다. 현재의 단군성전 위치에는 신사도 지어졌다. 50미터 국제규격의 파라다이스 수영장과 10개의 사대를 갖춘 10미터 공기총 사격장이 들어선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파라솔이 딸린 매점도 있었고 사진사도 상주하는 등 명실공히 유원지였던 것이다. 이재준의 기억 속에 남은 사직공원은 바로 이 시기였던 셈이다.
동네의 기억은 계속 이어진다.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의 길은 1968년의 1.21 사태 이후 닫혀졌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주간에만 개방하기 시작했다. 24시간 전면 개방된 것은 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다. 그런데 이재준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교복을 입고 있으면 통행이 가능했다. 경복궁 맞은 편 정독 도서관에 가기 위해 이 길을 자주 오갔다. 헌병이 지키고 서있었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가던 학생들은 '사람이냐, 인형이냐' 하면서 손짓을 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가끔 열려 있는 문 뒤로 탱크가 보이곤 했다.
여기까지가 이 동네에 대한 이재준의 기억을 받아 적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동네가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이 누상동인 덕분에 서촌에서 태어나 살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출신이었고 이곳이 그에게는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단성은 문익점의 고향이면서 그가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한 곳이기도 하다. 성철 스님 생가도 이곳에 있다. 아버지는 20세 때 가출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할머니가 계속 살고 계셨고, 어린 이재준은 여름방학이면 서울 구도심을 떠나 지리산 자락의 대자연이 제공하는 온갖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지극한 사랑으로 그를 보살폈다. 손자 왔다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에 눈물을 흘려가며 밥을 지었고, 따뜻한 품 안에 그를 안고 자기도 했다. 할머니와 함께 근처 대원사에 나들이 갔던 날은 맑았던 하늘에서 장대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쳤다. 날씨가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된 날이었다. 할머니는 그가 대학 시절 이 세상을 떠났다.
단성의 친구들은 도시와 다른 시골의 즐거움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돼지 오줌보로 축구공을 만들어 차며 놀았고 물고기를 잡고 수영도 실컷 했다. 산에 꿩이 그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다. 망개떡도 안 사주던 아버지는 시골에 갈 때면 용돈을 주셨다. 동네 가게에 가서 라면땅, 새우깡 같은 것을 사서 친구들과 나눠 먹었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사지 않았던지 죄 먼지가 가득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골은 너무 재미있는 곳이었다! 밤이면 정말 하늘이 칠흙 같이 어두워서 반딧불을 잡아 랜턴처럼 앞을 비추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밤 8-9시 경에는 물고기들도 잠을 자기 때문에 플래쉬로 비춘 후 세숫대야로 뜨면 다 잡을 수 있었다. 낚싯줄로 개구리를 잡아 패댕이 친 후 빨대로 개구리 배에 공기를 넣어 부풀려 터트리며 놀았다. 잔인하다는 생각은 못했고 그냥 재미있었다. 동네에 티비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어느 한 집에 다들 모여 마린보이, 태권브이 등을 봤다. 그 동네 친구들에게 이재준은 '일 년에 한 번 오는 세련된 서울 친구'인 셈이어서 그가 갖고 가는 알록달록한 고무 '쥬브'는 인기가 만점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는 서울의 구도심과 지리산 자락의 산골 마을이라는, 상상 가능한 최상의 조합이 주어진 셈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고향을 하나씩 물려 받은 사람은 흔치 않다. 이사를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그의 세상은 넓고 추억은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