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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두진 Mar 13. 2021

마당이 있는 집

2021년 3월 10일 김명진(가명)과 나눈 이야기

(*인터뷰이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고 핵심 정보들도 적절히 변경합니다.)


일이나 연애보다 공간에 대한 꿈이 더 많았습니다.

항상 지금이 베스트가 아니고 넥스트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집에 대한 생각 같아요.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마당이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 석양처럼 낮게 깔려있던 이른 봄날 저녁, 김명진과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집을 인터뷰하다' 시리즈의 처음 상대로 그 분을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뜻밖에 본인이 먼저 그 이야기를 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인데요.' 마침 삶에 별로 드라마가 없어 보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겨보고 싶었다고 하자, 그럼 자기가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전에 질문 몇 개를 보냈지만 사실 별 의미는 없고 오늘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고, 일부러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자 재미있겠다는 대답이 말과 눈빛으로 돌아왔다. 본인 자신이 직업상 수 많은 고객들을 인터뷰해왔지만 이렇게 반대 편에 있어 보기는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간단한 안주와 하이볼 두 잔을 연료삼아 길을 떠났다.


집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외할머니댁. ㄷ자 한옥이었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미서기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햇살이 가득한 마당이 펼쳐졌다. 남쪽으로 단층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화장실과 창고가 있었고 좁은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한 낮 외할아버지께서는 이불을 탁탁 널어 말리셨다. 이 집에서 자연과 가까이한다는 느낌을 처음 가졌다. 이 말을 들으며 거칠게 그린 스케치를 보여주자, 이런 집이 맞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장면은 회사 일로 인도네시아에 출장을 갔을 때였다. 발리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곳의 새로 생긴 호텔이었는데, 문명의 이기를 배제하는 것을 컨셉으로 잡은 곳이었다. 전화도 티비도 없는 그 곳에서 그 어떤 출장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왜 자연일까. 시골 출신도 아니고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기억도 없다. 하지만 처마 아래 앉아 온 몸으로 햇살을 받거나 비와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자연을 내 것으로 만드는 느낌은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다. 결국 그 꿈을 좆아 지금 수도권 외곽의 한 타운하우스 단지에 살고 있지만, '벽을 다른 집과 공유하지 않는' 진정한 단독주택으로 가는 것이 다음의 꿈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보여준 집 사진에는 능소화와 블루베리가 자라는 손바닥만한 마당이 보였다. 집 안에도 여러 식물들을 키우는데 그 중에서도 율마가 눈에 들어왔다. 율마는 키우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율마는 새침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과 동물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수형도 반듯하고 어디 하나 변색된 곳도 없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고 선이 곧고, 크는데 시간도 많이 걸려요.


날 닮았죠.  


그렇다, 유난히 자세가 곧고 음성이 맑은 사람, 김명진은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1971년 생. 현재 대한민국 인구 그래프에서 가장 두툼한 '배둘레햄', 바로 그 연령대다. 전형적인 베이비 부머인 셈인데 그만큼 경쟁도 심하고 부대끼는 삶을 살았다. 역으로 이 연령대를 상대로 사업을 하면 워낙 사람이 많아서 잘 된다고 한다. '응답하라, 1988'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다. 덕선이, 선우, 동룡이, 정환이, 택이 모두 극중 인물이지만 1971년 생들이다. 고2 때 88 올림픽, 평균적으로 첫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경험한 세대다.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 성공 신화 최고의 수혜자들이다.


어머니는 서울, 아버지는 충청도 분이다. 상계동 집은 마당이 있었고 펌프가 있었다. 그러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마당과 인연을 맺었고, 지금도 마당을 꿈꾸며 살고 있는 셈이다. 특이하게도 서울 출신이지만 본적은 아버지 덕에 충청도다. 살아본 적도 없고, 중학생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된 주소인데, 처음 가 봤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이렇게 답답한 시골에서 살았을까 싶었다. 지도에서 보면 충주호/청풍호 남쪽의 깊은 산골이고 대강 이런 분위기다. 아버지는 신여성 어머니에 비해 조건이 조금 빠졌지만 그걸 수려한 외모로 극복하셨다고.  

두 번째 집은 인왕산 기슭이었고 덕분에 인왕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의 지하철 3호선 홍제역 인근으로, 멀지 않은 곳에 홍제천과 그 위에 지은 유진상가가 있다. 이 집은 마당도 작았고 방도 두 개 밖에 없었다. 일자형 평면에 방-마루-부엌-방, 이런 식이었다. 인왕산 기슭과의 인연은 이후에 반복된다. 마치 비행기 항로의 이정표(waypoint)처럼, 삶의 방향이 결정적으로 바뀔 때 찾아가게 되는 지점이었다.


신월동의 세 번째 집으로 이사가면서 당분간 마당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김포공항 32번 활주로 바로 동남쪽이었다. 집의 규모가 더 줄어 단칸방이 되었고, 전학 간 초등학교는 2부제였다. 서울에서도 인구밀도 높기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했지만, 동년배 사람이 너무 많은 1971년 생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다음에도 같은 신월동 안에서 빌라로 이사갔다. 지금도 집 값이 기억나는데 정확히 2,500만원이었다. 여기서 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다녔다. 대학은 완전히 서울 반대편이라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음성이 일품인 사람답게 역시 중고등학교 때는 방송반을 했고 대학 때는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누구나의 삶에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것이 있는데, 김명진은 그것이 타고난 음성, 그리고 단아한 자세다.  

다음으로 이사 간 곳은 동부 이촌동. 드디어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성했다. 이 아파트는 1976년, 그러니까 그 분이 만 5세였을 때 지어진 아파트였는데, 건립 당시 12층으로 고층 아파트의 명성을 누렸다. 청계천 자재상 사이에서 이 아파트 이름을 딴 벽지가 유행했을 정도였다. 이후 두산건설이 사업자로 선정되어 2008년 리모델링을 성공리에 완료, 대한민국 공동주택 리모델링의 한 획을 그은 바 있다. 현재의 두산위브트레지움으로 특이하게도 Y자형 평면이다. (그런데 트레지움은 '비극의 집'이라는 뜻인가.) 동부 이촌동에서도 가장 서쪽 초입에 위치한다. 20대 후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무렵,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드디어 독립을 결심했다. 평상시에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는 강철 같은 멘탈을 보이기도 하다는 것이 인생의 진리다. 가까운 친구와 의기투합해서 찾아간 곳은 청운동, 그러니까 인왕산의 동쪽 기슭이었다. 어린 시절 맺었던 인왕산과의 인연이 다시 돌아온 셈이다. 화가인 그 친구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며 돈독한 우정을 유지해오고 있다. 당시 살았던 상가주택이 여섯 번째 집이었다.


결혼을 했다. 배우자가 먼저 살고 있었던 영등포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이전에 살던 신월동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차이가 있었다면 관악산을 지나 김포공항 32번 활주로로 내려가는 비행기가 머리 위가 아닌 북쪽 하늘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었으리라.


거기에서 또 이사를 갔다. 배우자의 부모님 댁과 가까운 곳으로 갔는데, 또 다시 신월동의 별 이름 없는 아파트였다. 김포공항과 더 가까워졌다. 다시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이게 여덟 번째 집이었다.


첫 아이이자 유일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갈 무렵,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다시 집을 옮겼다. 이번에는 모 뉴타운의 삼성 래미안으로 갔으니 드디어 네임드, 브랜드 아파트에 입성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중산층의 꿈이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었을까.


아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절대 한 군데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그래서 또 이사를 갔다. 이번에는 마곡이었다. 신개발지 마곡,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볕이 잘 안드는, 어둡고 침침한 아파트였다. 여기에서 살면서 햇빛이 그리웠고, 마당이 그리웠다. 직업적으로 글을 쓸 일이 가끔 있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청탁도 받지 않고 일기처럼 쓴 글이 아직 남아 있다. '원 파인 스프링 데이'라는 화사한 이름의 글, 하지만 내용은 비장했다.


'이사를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을 벗어나야 한다. 이 우중충한 북동향의 집에서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다시 이사 간 곳이 서울 수도권 외곽의 한 타운 하우스 단지, 지금도 가족과 함께 그 곳에서 살고 있다. 열 한 번 째 집이다. 손바닥처럼 작은 마당이지만 4층이어서 경관도 있고 햇살이 가득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자기를 닮은 율마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바로 그 집이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람은 머리를 쓰고, 그리고 계획이 있으니. 이 집에서 살아보니 마당이 꼭 1층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글쓴이가 주장하는 '무지개떡 건축'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소원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 안락사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집에서요.



큰 그림에서 보면 김명진은 서울 북서부의 외곽지역에서 평생을 거의 다 보냈다. 본인도 인터뷰를 해 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학교나 직장은 종종 이 범위를 벗어나곤 했지만 이 지역의 산과 들, 그리고 물은 마치 자석처럼 그리고  운명처럼 김명진을 다시 이 지역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두 번 정도 인왕산 일대에 살았었으나 당시 서울의 중심은 이미 강남으로 옮겨간지 오래였다. 그런 점에서 그 분의 삶은 주변적이고, 그래서 보편적이고, 그래서 친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글을 쓰고 또 구경을 다니는, 나름 화려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 모쪼록 평생의 소원인, 누군가와 벽을 공유하지 않는 온전한 단독주택에서 햇살 가득한 마당을 누리고 사는 삶을 너무 늦기 전에 꼭 이루기를 기원한다. 바야흐로 이제 봄이니, 슬슬 발품 파는 것으로 시작하시기를.


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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