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플레이리스트>로 본 플랫폼 자본주의
넷플릭스 시리즈 <플레이리스트>는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의 창업기를 담은 6부작 드라마이다. 여섯 명의 인물, 여섯 개의 시선을 따라가며 스포티파이라는 서비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창업자 다니엘 에크가 구글 입사에 떨어지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그 탈락은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그의 비전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곧 스포티파이의 출발점이 된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사업 비전’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다니엘의 비전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끄는 방향성이었고, 그 방향에 공감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 회사를 만들어간다.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이 하나의 비전을 중심으로 시너지를 만들고, 함께 추진력을 얻어 나아가는 모습은, 비전이 어떻게 현실의 동력이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기술적 역량 못지않게, 그 기술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사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모습은 IT업계에 있는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플레이리스트>는 소위 창업 신화라 불리는 스포티파이의 창업 스토리를 다루면서도 플랫폼 자본주의의 그늘도 예리하게 포착한다.
서비스의 성장과 성공은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조적 부의 독점은 마냥 박수칠 수만은 없다.
긱 이코노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우려했던 논의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플랫폼 위에 구축된 질서는 소수의 소유자에게 부를 집중시키고,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플랫폼에 의지하거나 플랫폼과 싸워야 하는 위치에 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묘사된 '성공'은 기술적 혁신이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의 재편성과 독점 구조가 있었다.
플랫폼에 올라섰으나 소외되는 이들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에피소드 주인공은 싱어송라이터 ‘보비’이다.
보비는 다니엘과 학창 시절 친구였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노래하는 가수이다. 보비를 통해 우리는 플랫폼에 올라가는 콘텐츠의 창작자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된다.
시리즈 초반 그의 노래는 불법 해적 사이트를 통해 소비되었고, 시리즈 후반에서는 스포티파이를 통해 소비된다.
보비는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창작자인 자신 사이의 수익 분배 부당성을 주장한다. 창작의 노력보다 그 음악이 대중에게 닿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한 플랫폼의 기술이 더 큰 대가를 가져가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보비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앞서 내내 스포티파의 창업 성공을 향해가던 스토리에서 갑자기 스포티파이가 악덕 플랫폼처럼 그려지는 뜬금없는 전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전조는 앞의 에피소드에서도 중간중간 내비쳐진다.
음악이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길 바라는 스포티파이가 ‘무료’를 내걸 때, 음반사 대표 페르 순딘이 음악가의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격분하며 외칠 때에도
스포티파이는 음악가의 권리와 보상은 어떻게 보장할까? 이 부분이 시리즈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질까? 에피소드가 이어지면서 기다렸다.
보비는 단순한 반골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플랫폼 속에서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소외되고,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분노와 저항은 특정 개인의 반발심이 아니라, 창작자이자 노동자로서 겪는 구조적 불균형에 대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우리 역시 보비처럼 플랫폼 위에 무언가를 만들고 있지만, 처음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그 구조가 어느 순간 지나치게 계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반감이 생긴다.
페르 순딘이 음악가의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 순딘과 기존의 음원 공급사들은 정당한 보상을 지불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기조는)
하지만 창작자가 소외된 스포티파이의 비전,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음악 생태계’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시리즈가 보여준 현실은 창작자의 몫은 줄고, 플랫폼의 영향력만 커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품은 의문은 이것이었다.
스포티파이는 창작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것’을 빼앗고 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이건 단지 음악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플랫폼 위에서 일하고, 만들고, 팔고, 연결되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스포티파이는 불법 유통으로 무너졌던 창작물의 가치를 복원하는 데 분명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창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기보다는, "불법보다는 낫다"는 윤리적 우위에 기대어 자신들의 수익 모델을 정당화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들은 허물어진 자리에 새 질서를 세운 것이 아니라, 허물어진 틈을 가장 빠르게 점유한 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랫폼이 정말 새로운 구조를 만들었을까?
오히려 기존 음악 산업의 기득권 구조를 더 빠르고 조용하게 고착화한 것 같았다.
기술은 혁신을 일으켰지만, 그 혁신은 위계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음반사, 유통사, 미디어라는 기존의 권력 구조는 여전히 견고했고, 스포티파이는 이 구조를 더욱 효율적으로 강화했다. 창작자는 여전히 수익 분배의 맨 아래에 있었고, 플랫폼은 그 위에서 전체를 통제했다.
스포티파이가 진정 공정을 원했다면, 스스로 구조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스스로를 제약하거나 자정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시리즈 초반, 다니엘의 비전은 순진한 이상주의처럼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더 나은 음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기술만으로 공정을 만들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었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꿈꿨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래된 구조를 더 날렵하게 복제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혁신은 이루었지만, 자본의 논리와 타협하며 자신도 모르게 기존 구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다니엘은 선의로 시작했지만 구조를 바꾸지 못한 이상주의자처럼도, 혹은 그 선의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현실주의자처럼도 보인다.
스포티파이에 대한 나의 판단은 양면적이다.
플랫폼은 분명 불완전했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더 나은 구조가 있었을까?
불법 유통이 일상이던 시절, 이 시스템은 창작자에게는 작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이용자에게는 정당한 소비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 불완전함 속에서 진짜 논의와 협상이 가능해진 것은 아닐까.
기술이 만든 혁신은 때때로,
구조를 더욱 정교하게 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랫폼 위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