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야 Nov 08. 2023

실존하는 인간의 이중성

연극 태양 by. 극작 - 마에카와 토모히로 / 연출 - 김정

[연극] 태양 (2023)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만약 내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서 몸도 아프지 않고, 늙지 않으며, 신체를 비롯한 모든 능력적인 측면이 완벽하게 이루는 존재가 된다면 어떤 삶을 살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영원한 삶이 꼭 좋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는 부러운 이야기라며 분노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나의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영원한 삶을 산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항상 부조리한 존재였다. 하루의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에 반복적인 일상을 매번 마주한다. 의미 있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는 형상 없는 자유의 하루일 뿐이다. 그러나 불멸이라는 매력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하루의 부조리함을 반복할지라도 그것은 지울 수 없다.  

  

연극 태양은 바로 우리가 질문하는 바로 삶과 죽음의 관점을 보여준다. 밤이 되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 같은 불멸의 존재 녹스와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큐리오의 생과 사를 연결하여 진리를 묻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이렇게만 말하면 당연히 밤의 종족이자 영원한 인생을 유지하는 녹스가 옳다고 말할 수 있다. 큐리오라는 옛날의 늙고 허약한 육체는 필요 없다. 오로지 신인류로서 인생을 살아가면 우리도 행복해질 것이다. 다만 태양을 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다운 사고가 정지된다는 것은 과연 행복할까? 당연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본래의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옳은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실존적인 자유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살아있는 육신을 가져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큐리오의 입장이 모두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햇빛을 볼 수 있는 인류 큐리오는 녹스에 대한 차별과 대립 반목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지만 이런 점마저도 헛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생존을 위해 하루를 버티기만 한다. 이러한 나약함은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엘리트가 되지 못한 도태된 현대사회의 빈민층의 사회 복지 시스템처럼 보인다. 아무런 성과도 할 수 없는 허약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순간을 넘기기 어려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스와는 다르게 실존해 있다. 태양을 보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살아가는 의지와 투쟁만으로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결국 큐리오와 녹스는 어느 쪽이 부럽고, 능력 있고를 떠나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존재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들이 살고 있는 이중 구조의 세계는 대립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존을 추구한다. 서로라는 존재의 집단은 분명히 다르다. 또한 서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다른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둘은 다름을 의지하여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대립과 차별을 넘는 행위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둘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존재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스에게는 인간다움을 큐리오에게는 영원한 안정과 새로운 삶의 방향을 위해 협력한다. 비록 그 관계가 쉽게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은 그 두 관계에게 매우 중요하며, 영원한 숙제처럼 남겨진다. 

  

그래서 인간은 극단적인 집단 혹은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사회적인 동물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통해 본래의 실존을 회복하는 대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르트르의 말하는 인간에 대한 의미를 먼저 되짚어보자 인간은 ‘B와 D 사이의 C이다’.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선택. 집단이 아닌 본연 한 자신의 의한 선택이다. 그 점에서 연은 녹스라는 존재의 완벽함을 칭송하던 초반부의 큐리오와 달리 서서히 자신의 선택을 관철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존재를 찾으려는 녹스가 선택을 결정하며 인간의 본래적인 가치를 끄집어냈다. 그러한 과정을 이끌어내기까지 노력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이유가 있다.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나 냉철한 분석도 한다. 그러나 매번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하고 방황한다. 한 순간에 실수에 무너질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 받아들이고 나아가야만 인간은 실존한다. 후지타와 데츠히코가 인간으로서 결정을 내렸다. 소이치와 유지가 인간으로서 막을 끝냈다. 그렇기에 연극 태양은 인간에 대한 의미를 찬미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연극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