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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Jun 26. 2023

누구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가?

맨 오브 라만차 by. 데일 와서먼

맨 오브 라만차 (2021)

미치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자신이 취미로 읽던 기사도 문학에 빠져 스스로 기사라고 생각하는 늙은 영주. 풍차를 거인으로 받아들이고, 여관 주인에게 기사의 작위를 받기를 원한다. 늙은 자신의 몸은 생각도 않고 악과 맞서 싸우고자 돌진한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바보 같은 그의 행동에 삿대질한다. 그리고 정신 나간 인간이라며 조롱한다. 분명히 원작작가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는 미친 기사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통해 세상을 향한 강렬한 풍자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구성된다. 원작을 사랑하는 돈키호테의 팬들에게는 불만이 가득할 수 있다. 나의 돈키호테는 이렇지 않는다는 부정을 하며 뮤지컬을 불편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꿈을 향한 어느 이상주의자의 달변처럼 포장되어 올라간 뮤지컬은 원작에 못지않은 인기를 가진다. 왜 사람들은 이런 뮤지컬에 열광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뮤지컬의 서사가 사람들에게 또 다른 풍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새롭게 창작된 돈키호테는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반항적이다. 늘 믿는 꿈에 대한 이상향을 노래한다. 그런 태도가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지점에 큰 울림이 되어준다. 그것이 관객들에 심장을 파고든 결정적인 역할로 자리 잡았다.

  

뮤지컬의 시작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실제 경험을 사용하여 시작한다. 종교재판에 넘겨져서 감옥에 가고,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절망적인 지하감옥의 죄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같이 연극을 하며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가르친다. 미치광이이고, 늙은 정신병자임에도 그는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기사라는 헛된 꿈 말이다. 물론 기사라는 것은 그 시대에는 더 이상 사라진 신기루 같은 것이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늙은 육체를 일으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 무엇하나 꿈꾸는 것이 있기에 삶은 지속된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꿈이라는 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항상 밑바닥 인생으로 어딘가에 치이며 살아가는 익숙해진 나에게 필요 없다고 단정한다. 결국 희망조자 사라진 인생을 위해 무엇이 필요로 하며 살아갈까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나오는 건 없다. 하루마다 벌어가는 더러운 돈과 먹고사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라만차의 기사에게 그런 인생은 대수롭지 않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과 기사라는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세상을 향해 악을 무찌른다. 희망찬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나의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뮤지컬에서 돈키호테가 입으로 전달하는 대사로 끝나지 않는다. 나락으로 치달아버린 인생을 살아가는 죄수들에게 통용된다. 동시에 제4의 벽을 넘어 울려 퍼지는 노랫말과 배우의 외침이 나의 심장을 강타한다. 내 인생의 희망 따위는 전혀 없는 반복적인 삶에 지쳐있으면서도 꿈을 좇거나 자신만의 행복을 가진 이들을 시기질투해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순간에 고정되어 멈춰있는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희망을 찾는다면 그건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정을 이루거나, 목표를 달성했거나, 무엇을 위해 찾아가는 삶이 있다면 충분하다. 돈키호테처럼 나는 기사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 결국 꿈을 꾸는 존재가 미친 것이 아니라 꿈을 포기한 자가 미친 선택 했다고 믿는다. 물론 현실이 만만치 않고 괴로워서 많은 이들이 포기할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면 어떠한가 다시 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안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떠나야 한다. 어디라도 영광을 향해 가야만 한다. 매 순간이 가시밭길이라 지독할 인생의 회의를 느껴도 버티다 보면 이긴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보면 관객의 생각에 따라 비극과 희극으로 나눠질 장면이 있었다. 나는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희극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돈키호테의 꿈은 현실이라는 벽에 무너졌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남긴 ‘꿈’이라는 의미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한 이들이 손가락질할지라도 누군가가 다시 나아가면 그만이다. 세상이라는 높은 벽을 넘어서서 악과 맞서 싸운다. 슬픈 수염의 기사 돈키호테는 영원히 기사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그날을 위해 노력하는 미치광이들이 또 다른 현실을 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가 미치광이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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